살붙이가 보내온 회신을 읽어보고
지웠던 그림을 다시 드로잉하며
그리다 그만둔 지도 선을 따라 이어간다
이민 가는 이삿짐 포장 펜으로 쓴 주소에
잉크가 스며들어 젖어오는 우수 무렵
판자문 문 앞에 놓인 흐트러진 구두 짝 /이처기
우수 무렵이면 강물 풀리는 소리로 도처가 수런댄다. 진학이며 이사 같은 봄맞이 준비가 분주해진다. '살붙이'를 멀리 보내는 경우라면 말할 나위도 없겠다. '그리다 그만둔 지도'에는 그런 안팎의 어수선한 심사가 담겨 있다. '지웠던 그림을 다시 드로잉'하며 지도 '선을 따라 이어가'는 데서도 묵묵히 감당하는 아버지의 뒷목 같은 게 짚인다.
'이민 가는 이삿짐 포장'과 '펜으로 쓴 주소'. 거기 '잉크가 스며들어' 번지는 모습은 간단치 않은 여정의 환기인 양 스산하다. 하지만 '우수 무렵'의 물기 어린 한편에는 새로운 시작의 설렘도 겹친다. 앞을 향한 서두름이거나 지난날의 벗어던짐이거나, '흐트러진 구두 짝'의 여운도 길어진다. 하릴없이 어른대는 지난날의 '구두 짝'들. 함부로 벗고 온 그것들은 생의 어느 하구에서 철썩이고 있을지….// 정수자·시조시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