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들의 公敵 정난정
‘서출 멍에’ 거부하다, ‘악녀’ 낙인 찍혀. 문정왕후
(文定王后) - 불교중흥 도와 … 독살누명 쓰고 자결
정난정의 아버지 정윤겸(鄭允謙) 이부총관을 역임한 양반이었지만 어머니는 군영에 소속된 관비(官婢)였다. 조선은 양반수의 증가를 막기 위해 신분이 다른 두 남녀 사이에서 난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을 실시했는데, 난정은 이법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천인(賤人)이 되었다.
정난정은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으며 심지어 물건처럼 매매되는 신세를 저주했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자신을 따라 천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그녀를 더욱 절망케 했다. 중국은 서얼을 그다지 차별하지 않는다는데 왜 조선만 유독 적서(嫡庶)를 구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조선은 오직 양반 적자(嫡子)만을 위한 나라였다.
난정은 양반 적자 출신인 윤원형이 이런 의식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했다. 윤원형은 조선 사대부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불교를 신봉했다. ‘명종실록’ 은 윤원형이 ‘중에게 시주하고 부처에 비는가 하면 산에 제사를 지내고 불경을 외는 등 하지 않는 짓이 없었다’ 고 비난하고 있는데, 그의 이런 불교 신봉은 독실한 불교도인 누이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게 되자 조선의 국시를 불교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책을 앞장서 수행한 남성이 승려 보우(普雨)라면 여성은 난정이었다. 난정과 문정왕후, 윤원형과 보우는 불교를 매개로 신분을 뛰어넘는 동지가 되었다. 문정왕후와 보우가 폐지되었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부활하고 승려들의 도첩제를 부활시키는 등 제도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국시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면 난정은 불사중창이나 불교행사 등 생활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연려실기술’ 에는 난정이 해마다 두세 차례씩 쌀 두어 섬의 밥을 지어 두모포(豆毛浦)에 가서 물고기에게 던져 준 사실을 전하고 있다.
난정의 깊은 불심은 대비 문정왕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문정왕후는 명종 4년(1549)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그 첩의 소생은 다른 집 적자와 통혼할 수 있게 했다. 물론 그 첩은 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허용했다. 난정은 윤원형이 전 현감 김안수(金安遂)의 딸인 부인 김씨를 내쫓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윤원형은 난정을 부인으로 삼았으나 이는 조선의 국법이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기 넉 달 전인 명종 8년(1553) 3월 임금을 시켜 ‘윤원형의 첩에게 직첩(職牒)을 주도록 하라’ 는 명령을 내리게 함으로써 난정은 합법적인 부인이 되었다. 당시 윤원형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이었으므로 그녀도 단숨에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된 것이다.
그녀의 자식들도 자연히 서출(庶出)의 굴레에서 벗어나 어엿한 적출(嫡出)이 되었다. 그러나 난정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과 자신의 자녀만 서출이란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다른 서출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저주하던 서출의 설움을 잊지 않았다. 명종 8년 10월 좌찬성 윤원형이 영의정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난정의 강한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었다.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고 해서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王者)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서얼들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과감한 주장이었는데, 이에 대해 이조 판서 안현(安玹) 등은 반대했다. 그러나 윤원형은 다른 벼슬아치들과 합세해 끝내 서얼허통법을 통과시켰다. 난정은 천인들과 서출들이 주인들과 적출(嫡出)들에게 당하는 억울함을 충분히 체험했다. 전국 각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노비들이 그들 부부에게 몰려들었다. ‘명종실록’의 ‘(주인에게) 죄를 지은 노복(奴僕)들이 서로 이끌고 모여들어 그 수가 대단히 많다’는 기록은 이런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명종 18년 윤원형이 영의정이 되면서 난정도 외명부의 수장이 되었다. 관비(官婢) 소생의 천출 난정이 드디어 조선의 모든 벼슬아치 부인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부처님의 공덕으로 믿고 더욱 열심히 불교를 전파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난정을 저주하면서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명종 20년 4월 6일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명종은 이양(李樑)을 중용해 윤원형을 견제했을 정도로 외삼촌 윤원형을 싫어했다. 명종은 대비 사망 후 경연에서 한나라 문제(文帝)가 외삼촌 박소(薄昭)를 죽인 사례를 언급했는데, 이는 윤원형을 공격하라는 신호였다. 명종 20년 8월 3일 대사헌 이탁(李鐸)과 대사간 박순(朴淳)이 윤원형을 탄핵하는 첫 포문을 열었다. 이들이 윤원형을 공격한 첫 번째 사유가 ‘관비(官婢)의 소생을 올려서 부인으로 삼은 것’이었던 점은 난정에 대한 사대부의 반감의 크기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한달 후에 다시 첩으로 강등되었고 시골로 쫓겨난 윤원형을 따라갔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명종 20년 9월 윤원형의 전부인 김씨의 계모 강씨가 난정이 김씨를 독살했다고 고소했다. 난정이 전부인 김씨의 몸종 구슬이를 시켜 음식 속에 독약을 넣어 독살했다는 주장이었다. 고소장을 접수한 형조에서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자신들이 처리할 수 없다며 역모 등 체제사건을 다루는 의금부로 이첩했다. 의금부는 구슬이는 물론 10여 명의 여성들을 소환해 문초했는데 짜맞춘 구도대로 진술하기를 거부하는 여성들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명종실록’ 10월 22일자의 ‘전일 형문한 사람은 모두 죽고 단지 주거리(注巨里·정난정의 여종)만 남았다’ 는 위관의 보고는 이런 사정을 잘 말해준다. 이는 그녀들이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했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관련자들이 모두 죽자 의금부는 난정을 잡아다 심문하자고 청했다. 의금부가 원하는 것은 사건의 진상이 아니라 난정의 목숨이었다. 명종은 어머니의 무덤에 풀이 돋기도 전에 어머니의 동기를 내쫓고 어머니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마저 장하(杖下)의 귀신으로 만들기는 너무 빠르다는 생각에서 일단 거부했다. 난정은 자신의 부인첩을 거두라는 주장을 한 달 동안 거부하는 체 하다가 윤허한 것처럼 이번에도 종국에는 허락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끌려가면 장하(杖下)의 귀신이 되리라고 직감한 그녀는 사대부들의 조롱 속에서 신음하지는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녀는 명종 20년(1565) 11월 3일 금부도사가 온다’ 는 종의 말을 듣고 ‘남에게 제재를 받느니 스스로 죽음만 못하다’ 며 자결했다. 난정이 죽자 그녀를 가슴 깊이 사랑했던 윤원형도 뒤를 따라 음독자살했다. 그녀는 죽은 후 다시 천인으로 환원되었고, 사대부들은 그녀를 성리학과 강상(綱常)을 어지럽힌 만고의 죄인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을사사화의 배후 “나쁜것은 난정 탓” 윤원형의 떠넘기기
조선에서는 악정(惡政)의 배후에 항상 악녀(惡女)가 있는 것으로 그렸다. 연산군에게 장녹수가 있고, 광해군에게 개시가 있는 것이 그런 예이다. 명종이 즉위한 1545년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乙巳士禍)의 배후에 난정이 있었던 것처럼 전하는 것도 이런 유형이다. ‘을사사화’는 왕실 외척인 윤임과 윤원형간의 대립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윤원형이 윤임 일파를 역모죄로 무고함으로써 사림 등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이다.
하지만 ‘윤원형 삭탈 명령서’를 살펴보면, 난정이 대비의 와병 때 문병한 것을 비난하는 대목은 있어도 을사사화 관련 내용은 없다. 또한 을사사화 희생자들을 신원(伸寃)하는 명령서에도 그녀가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은 없다. 이는 윤원형이 나쁜 것은 난정 때문이란 등식을 만들어 악정의 배후에는 악녀가 있다는 전형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