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후라도 우리 큰 아드님께서는
석 달 복밖에 입지 않으실 터이니,
이리되면 그때 가서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 소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영감님 성복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돈하여 사람이 모르게 될 것입니다.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 하오리까 만은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란 말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꺼내 자결을 하고 만다. 아들들이 그녀를 부둥켜 안았을 땐
가게 하고 싶었던 여인, 죽음으로써 부조리한 인간 차별화를
타파하고 싶었었던 선구자적인 新女性(신여성) 이 어머니의
죽음은 楊士彦(양사언)이 더욱 훌륭한 文人(문인)이 되는데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조선 3대 名書藝家(명서예가)이자 文人이다.
士彦의 호가 蓬萊(봉래)인데 士彦(사언)이
관직에 올라 지금의 철원 사또로 부임하게 되고
자연히 지척에 있는 금강산을 자주 찾아
금강산의 매력에 흠뻑 젖어 살게 되었다.
여름 금강산을 蓬萊山(봉래산)이라 함은 모두 알 터
그래서 호를 蓬萊(봉래)라 하였다.
금강산을 노래하고 금강산을 그린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만은 얼마나 금강산을
사랑했으면 자기의 호를 蓬萊(봉래)라 했겠는가...
이 작품은 그의 장기인 초서가 유감없이 드러난 것으로
활달 분방한 필세가 잘 나타나 있다 하며,
[봉래산인(蓬萊散人)].[양사언인(楊士彦印)]의
도장 2과(顆)가 찍혀 있다.
霜餘水反壑 (상여수반학) 서리 녹아 내린 물 계곡으로 흘러가고
風落木歸山 (풍락목귀산) 바람에 진 나무잎도 산으로 돌아가네
염염歲華晩 (염염세화만) 어느덧 세월흘러 한 해가 저물어
昆蟲皆閉關 (곤충개폐관) 벌레도 모두 다 숨어 움추리네
(모셔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