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5년~ ?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ㆍ취화사(醉畵士) 등 여럿을 썼다. 안산시 단원구는 그의 호 단원을 따온 지명이다. 정조 시대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 정조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에서 김홍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삽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 등에 뛰어났다. 주로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렸으며 서당, 씨름 등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고, 시도 써서 아들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유묵>이라는 문집도 있다.
고기잡이
당시의 어촌의 고기잡이 모습이 잘 살아 있다. 울타리처럼 쳐져 있는 것이 울짱인데 울짱은 주로 떡갈나무나 소나무를 이용하여 물이 앝은 바다나 산발치가 바다로 들어간 섬의 모래벌 가에 빙둘러 세운다. 울짱의 귀퉁이에는 물살에 따라 물고기가 들어가긴 해도 나오지 못하는 임통을 설치하고 조수물이 들어오면 물고기가 거기에 갇히게 되고 그 물고기를 가지러 어부들이 배를 나눠타고 임통 안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떠서 배에 저장한다고 한다. 그림에서 보면 울짱에서 물고기를 건져 배에 건네는 사람도 보이고, 중간의 배에는 아마도 물고기를 그 자리에서 조리하는 듯이 보이는 솥단지가 보인다.
대장간
풀무에 바람을 넣는 견습생, 달군 쇠를 모루 위에 대주는 사람, 쇠를 모양에 맞게 쇠망치로 내리치는 사람, 다 만든 연장을 숫돌에 가는 사람 등 대장간에서 일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즐거운 금속음이 들리는 듯하다.
기와잇기
대패질하는 목수, 수평을 맞추는 사람, 흙을 개어 올려주는 사람, 기와를 던지는 사람, 기와를 받는 사람 등 분업이 잘 이루어진 기와 놓는 현장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작업 현장 옆에는 아마도 주인인 듯 보이는 양반이 일을 잘하나 감시하듯이 긴 작대를 들고 지켜보고 있는듯... 하지만 누구 하나 그 양반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이 저마다 자기 일에 열중이다. 단원의 노동현장 작품이 좋은 이유는 노동의 즐거움이 그들의 표정에, 근육과 몸동작에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길쌈
이 그림에는 길쌈의 도구들이 자세히 나타나 있어 당시 서민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화면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베매기를 하는 여인의 모습이보이고, 하단에는 베짜기를 하는 여인과 이를 지켜보는 할머니, 등에 업힌 아이, 서 있는 아이가 보인다. 익살스러운 단원의 필치가 엿보이는 것은 마치 뒤에 서 있는 할머니가 베 짜는 여자의 시어머니인 듯, 손자에게 시켜 며느리에게 뭔가 지시하고 있는 듯하다. 손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아마 "엄마, 함니가 좀더 빨리 하래?" 눈치도 없이 이런 말을 한 건 아닐까?
논갈이
봄이 되었다. 논을 갈아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소들의 육중하고 힘있는 움직임에 굳었던 논바닥이 부슬부슬 일어나 흙들이 부드러워진다. 웃옷을 벗어던지 농부의 팔뚝에 힘이 들어가 근육이 생생히 보이고 거기에 땀방울이 맺힌다. 쨍그랑 쨍쨍~ 쟁기 부딪히는 소리가 날 것 같은 느낌, 경쾌하고 약동하는 농촌 풍경이다.
담배썰기
이 그림은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방안에서 담배를 써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에도 두 부류가 나타나는데왼쪽 상단의 작두질하는 사람과 오른쪽 아래의 담뱃잎을 정리하는 사람은 일하는 부류(아마도 아랫사람)이고,오른쪽 상단의 작두질을 구경하는 사람과 왼쪽 하단의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이 일을 시킨 주인네들인 것 같다. 일하는 두 사람은 웃옷을 벗어젖히고 무더위를 이기며 일을 하고 있고 주인은 부채질을 하며 책을 읽고 있다. 작두질을 구경하는 젊은 청년은 주인의 아들인가? 단원의 그림에는 종종 이렇게 일을 시키는 사람과 일을 하는 사람이 함께 나오는데 분위기는 아주 평화롭고 밝다.
행상
부부로 보이는 행상 가족의 모습이다. 당시 행상은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물품을 파는 상인을 말하는데 아무래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다보니 행색이 남루하다. 낡은 벙거지에 나무통 지게를 진 남자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아이를 업은 여인은 각자 행상을 떠나기 위해 헤어지려고 하고 있는 듯하다. 뭔가 아쉬움과 염려의 눈길로 아내에게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 있는 남편과 몸조심하라고 여러 번 말하는 아내의 정이 느껴진다. 아이를 업고 저고리를 입은 엄마는 아이를 긴 행려에서 조금이나마 보호하려는 모심을 보이고 있고, 질끈 행전을 묶은 바지차림과 치마를 걷어올려 허리춤에 끈을 묶은 모습에서 노곤한 행려의 길을 떠나는 모습이 역력하다.
벼타작
쉴 새 없이 일하는 농부들의 숨가쁜 움직임이 그대로 묘사된 그림이다. 힘은 들지만 일 년 동안 애쓴 보람의 수확을 하는 이 순간 농부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하다. 한 짐 타작할 벼를 지게에 지고 오는 사내의 웃음 띤 얼굴, 벼를 힘껏 들어 올려 탁탁 치느라 얼굴에 힘이 들어간 남자의 표정, 바닥에 떨어진 알곡들을 쓸어 모으는 사람, 타작벼를 묶는 사람 모두 재미있다. 뒤에는 주인쯤 되보이는 양반이 돗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긴 곰방대를 물고 에헴~ 거드름을 피고 있다. 돋자리 옆에 놓인 술병과 잔, 벗어 놓은 고무신까지 단원의 세심한 관찰이 그대로 보인다.
빨래터
이 작품은 꽤나 잘 알려진 단원의 작품 중 하나인데 <바람의 화원>에서도 이 장면이 묘사되어 나왔다.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편편한 돌판을 빨래판 삼아 방망이를 두들기며 동네사람들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두 여인, 흐르는 물에 훨훨 빨래를 흔들어 헹구며 짜내는 여인, 감은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여인과 그 옆에서 보채는 아기, 바위 뒤에서 몰래 숨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여인들을 엿보고 있는 한량의 모습이 익살스럽다. 특히 이렇게 여인을 엿보는 장면처럼 춘의가 담긴 작품은 신윤복이 즐겨 그리는 스타일로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이색적인 시각이다.
우물가
우물가란 그 마을의 모든 스캔들의 근원지이고 전달지이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어쩌구저쩌구 했다네~ 하는 여인들의 입방아에서부터물 길어올리는 여인에게 슬쩍 접근하여 작업 거는 남정네까지 마을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도마에 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이 그림에서는 더위와 갈증에 지친 남정네가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갓을 벗어 걸치고 가슴털을 드러내며 여인에게 물 한모금을 청하자 여인은 수줍은 듯이 얼굴을 돌리고 물을 건네고, 이 우악스런 선비는 왈칵왈칵 물을 흘리면서 거침없이 마셔댄다. 물을 한동이 머리에 이고 바가지를 손에 들고 치마를 걷어붙인 채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도 보인다.
자리짜기
방안에서 돗자리를 짜고 있는 남편과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있는 아내, 그 뒤편에서 책을 펴놓고 글자를 막대기로 짚어가며 글을 읽고 있는 아들. 모두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평범하고 푸근한 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장터길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두 페이지에 걸쳐서 실린 작품이다. 장터에서 물건을 다 팔고 돌아가는 길인 듯, 말을 탄 사람들의 행장이 가볍다. 삿갓을 쓰거나 갓을 쓴 사람도 보이지만 거의 맨머리 차림이 많고 바지에는 행전을 둘러 말을 타고 활동하기에 편하도록 복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편자박기
이 그림은 말에게 편자를 박는 것으로 조선시대 조영석의 편자박기도 유사한 그림인 것으로 보아 당시 이렇게 말편자를 박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네 다리를 묶어서 긴 대에 고정시키고 말이 하늘을 보도록 눕혀서 칼로 발굽의 바닥을 깎아낸 뒤 못을 박는다. 말이 무척 괴로워하고 있는 듯 하다. 중국에서는 말을 세워둔 채 발굽을 갈고 그 뒤에 편자를 박았다는데 조선시대에는 왜 굳이 말을 이렇게 눕혀서 괴롭게 하며 편자를 박았던 것일까? 말의 편자와 대갈은 말을 쉬지 않고 부리기 위한 인간 자신의 이익에서 나온 것으로 말에게는 큰 고통을 주는 일이라며 성호 이익은 이를 반대하는 글을 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