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여한가
- 옛 어머니들의 시집살이,
자식 거두기, 질박한 삶을 노래한 글과 사진입니다.
꾸민 이야기가 아닌 순박한 삶의 표현입니다.
마치 종처럼, 머슴처럼 산 기록을
이 글로 대신 체험해 보세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옛 어머니의 생각에 눈믈이 납니다 -
쇠락하는 양반댁의 맏딸로 태어나서
반듯하고 조순하게 가풍을 익혔는데 일도 많은
종갓집 맏며느리 낙인 찍혀
열
여덟 살 꽃다울제 숙명처럼 혼인하여 두 세 살씩
터울 두고. 일곱 남매 기르느라 철 지나고,
해 가는 줄 모르는 채 살았구나!
봄 여름에 누에치고,
목화 따서 길쌈하고 콩을 갈아 두부 쑤고,
메주 띄워 장 담그고 땡감 따서 곶감 치고, 배추 절여 김장하고,
호박 고지 무 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어포 육포 유밀과 과일주에 조청까지,
정갈하게 갈무리해 다락 높이 간직하네.
찹쌀 쪄서 술 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용수 박아 제일 먼저
제주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꺼리 맑은 술로 떠낸 다음.
청수 붓고 휘휘 저어 막걸리로 걸러내서 들일하는 일꾼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 걸고 소주 내려 묻어두네.
두 번 세 번 차려내고 늦은 저녁 설거지를 더듬더듬
끝마치면 몸뚱이는 젖은 풀솜 천 근처럼 무거웠네.
도맡아서 보리쌀 절구질해 연기로 삶아 건져 밥 짓고 국도 끓여.....
동지 섣달 긴긴 밤에 물레 돌려 실을 뽑아 날줄을
갈라 늘여 베틀 위에 걸어 놓고.
눈물 한숨 졸음 섞어 씨줄을 다져 넣어. 한 치 두 치 늘어나서
무명 한 필 말아지면 백설같이 희어지게 잿물 내려
삶아내서 햇볕에 바래기를 열두 번은 족히 되리.
하품 한 번 마음 놓고 토해보지 못한 신세, 졸고있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 꿰어 무거운 눈 올려 뜨고
한 뜸 두 뜸 꿰매다가 매정스런 바늘 끝이 손톱 밑을 파고
들면, 졸음일랑 혼비백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손끝에선 검붉은 피 몽글몽글 솟아난다.
내 자식들 헤진 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점잖으신 시아버님 의복 수발 어찌 할꼬?
탐탁잖은 솜씨라서 걱정부터 앞서고 공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맸어도 안목 높고 까다로운 시어머니 눈에
안 차. 맵고 매운 시집살이 쓴맛까지 더했다네.
침침해진 눈을 들어 방안을 둘러보면, 아랫목서
윗목까지 자식들이 하나 가득,차
내버린 이불깃을 다독다독 여며주고, 막내
녀석 세워 안아 놋쇠 요강 들이대고,
어르고 달래면서 어렵사리 쉬
시키면, 일할 엄두 사라지고 한숨이 절로 난다.
학식 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사시사철
끊임없는 접빈객도 힘겨운데,
사대 봉사 제사는 여나무 번 족히 되고, 정월 한식
단오 추석 차례상도 만만찮네.
식구들은 많다해도 거들 사람 하나 없고, 여자라곤
홀로로다.
고추 당추 맵다해도 시집살이 더 매워라.
큰 아들이 장가들면 이 고생을 면할
건가?
무정스런 세월가면 이 신세가 나아질까?
내 몸이 죽어져야 이 고생이 끝나려나?
그러고도 남는 고생 저승까지 가려는가?
어찌하여
인생길이 이다지도 고단한가?
토끼 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 없이,
어느 틈에 자랐는지 짝을 채워
살림나고,
산비둘기 한 쌍 같이 영감하고
둘만 남아, 가려운데 긁어주며 오순도순
사는 것이, 지지리도 복이 없는 내 마지막 소원인데,
마음 고생 팔자라서 그마저도 쉽지 않네.
안채 별채 육간 대청 휑하니 넓은 집에, 가믄 날에
콩 나듯이 찾아오는 손주 녀석 어렸을 적 애비 모습
그린 듯이 닮았는데, 식성만은 입이 짧은 제 어미를 탁했는지,
곶감 대추 유과 정과 수정과도 마다 하고,
정 주어볼 틈도 없이 손님처럼 돌아가네.
명절이나 큰 일 때 객지 사는 자식들이
어린 것들 앞 세우고 하나 둘씩
모여들면, 절간 같던 집안에서 웃음 꽃이 살아나고,
하루 이틀 묵었다가 제 집으로 돌아갈 땐, 푸성귀에
마른 나물, 간장, 된장, 양념까지 있는
대로 퍼 주어도 더 못 주어 한이
로다.
손톱 발톱 길 새 없이 자식들을 거둔 것이, 허리
굽고 늙어지면 효도 보려 한 거더냐?
속절없는 내 한평생 영화 보려한 거드냐?
꿈에라도 그런 것은 상상조차 아니 했고,
고목 나무 껍질 같은 두 손 모아 비는 것이, 내 신세는
접어두고 자식 걱정 때문일세.
회갑 진갑 다 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북망산에
묻힐 채비 늦기 전에 해두려고, 때깔 좋은 안동포를
넉넉하게 끊어다가, 윤달 든 해 손 없는 날
대청 위에 펼쳐 놓고, 도포 원삼 과두 장매 상두꾼들
행전까지, 두 늙은이 수의 일습 내 손으로 지었네
무정한 게 세월이라 어느 틈에 칠순 팔순,
눈
어둡고 귀 어두워 거동조차 불편하네.
홍안이던 큰 자식은 중늙은이
되어 가고, 까탈스런 영감은 자식조차 꺼리는데,
내가 먼저 죽고 나면 그 수발을 누가 들꼬?
제발 덕분 비는 것은 내가 오래 사는 거라.
내 살 같은
자식들아. 나 죽거든 울지 마라!
인생이란 허무한 것, 이렇게 늙는 것을,
낙이라곤 모르고서, 한 평생을 살았구나!
/옮긴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