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찾기(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영혼의 빵 / 헨리 나웬

약함 속에서의 결속 (Solidarity in Weakness)

   기쁨은 동정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동정이라는 말은 원래 '고통을 함께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을 가져온다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통 받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고 절망 속에 있는 사람과 자리를 같이하며 혼란과 불확실의 시간을 친구와 함께 한다는 것, 이러한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어떠한 행복이나 흥분이나 대단한 만족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함께 한다는 조용한 기쁨, 인간 가족 속에서 우리들의 형제자매들과의 깊은 결속 안에서 사는 기쁨 말입니다. 흔히 이것은 약함 속에서의 결속, 깨어짐 속에서의 결속, 상처 속의 결속을 의미합니다. 이 결속을 통하여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인간애를 나눌 수 있는 기쁨의 중심으로 가게 됩니다.

자신에게 자비로워지기 (Being Merciful With Ourselves)

   인생에는 침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침묵을 원하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 내면의 많은 소음들과 부딪치게 됩니다. 흔히 이 소음은 너무도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오히려 바쁘고 어수선한 생활이 침묵의 시간보다 더 낫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두 가지의 '소음'들이 우리들의 침묵 속에 재빨리 자리를 잡습니다. 그것은 욕망의 소음과 분노의 소음입니다. 욕망은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드러내 보이며 분노는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여러 인간관계를 드러내 보입니다. 그러나 욕망과 분노와 맞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3). 제사(sacrifice)는 '바쳐 올리는 것', '끊어 내어버리는 것', 태워 버리는 것' 또는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욕망과 분노를 가지고 이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끄러운 우리 자신에 대하여 자비로울 수 있으며 이 시끄러운 적을 친구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내면의 적들과 친구가 되기 (Befreiending Our Inner Enemies)

   어떻게 우리는 욕망이나 분노와 같은 우리 내면의 적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욕망과 분노가 말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욕망과 분노는 "나에게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있어"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야?"라고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욕망과 분노를 쫓아내려고 하는 대신 근심과 불안에 가득 차 있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치유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들떠 있기 때문에 욕망과 분노가 보다 깊은 사랑으로 변할 수 있는 진정한 내면의 쉴 자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욕망과 분노에는 우리가 다스릴 수 없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이 엄청난 힘을 사랑의 샘이 되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분노의 희생물이 될 뻔했던 사람들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

친절한 사람이 되기 (Becoming Kind)

   친절은 인간의 아름다운 속성입니다. 우리가 "그 여인은 참으로 친절한 사람이야" 또는 "그 사람은 참으로 나에게 친절했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매우 흐믓한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쟁적이며 또 때로는 폭력적인 이 세상에서 친절을 자주 접하기란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친절을 대하게 될 때 우리는 축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친절속에서 자라며 또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친절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당신의 '친족(kin)' 처럼 또는 당신의 가까운 친척처럼 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들은 친족입니다" 또는 "그 사람은 가까운 친척입니다" 라고 우리들은 말합니다. 친절하다는 것(to be kind)은 사람들을 '친족(kindred)'으로 생각하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들에게 하나의 도전이 있습니다. 피부 색깔이나 종교, 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은 같은 인류에 속하며 서로 친절해야 하며 그리고 서로를 형제자매처럼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우리가 이 도전에 직면하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 (God's Unconditional Love)

   하느님의 사랑에 관하여 우리는 무어라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만일 네가 어떤 일을 한다면,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는 만일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행동이나 말이나 또는 외모나 지식, 그리고 우리의 성공이나 인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우리가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존재하며 시간이나 환경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또는 무슨 말을 하던 하느님께서는 상관하지 않으시리라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시면 하느님의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관심 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과 관계 맺기를 원하시며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들도 하느님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두려움 없이 하느님과 친숙한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더 많은 사랑을 받으리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항상 존재하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기

   우리들은 흔히 조건 없는 사랑과 조건 없는 허용을 혼돈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시지만, 모든 인간 행위를 허용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배반, 폭력, 증오, 의심 그리고 그밖에 다른 모든 악의 표현들을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에 심으려 하시는 사랑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악은 하느님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악은 하느님에게 속하지 아니합니다.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란, 우리가 악한 것을 말하거나 생각할 때 도 하느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실종된 자식의 귀환을 부모가 기다리듯 그렇게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로 인하여 하느님의 마음이 슬플 때에도, 하느님은 우리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 진리가 우리들로 하여금 항상 존재하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줍니다.

온화함으로 옷 입기 (Dressed in Gentleness)

   때때로 우리들은 온화한 사람을 만납니다. 온화함은 각박하고 거친 것을 숭배하는 사회에서는 찾기 힘든 덕목입니다. 심지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더라도 우리는 일을 빨리 끝내라는 재촉을 받습니다. 성공, 업적 그리고 생산성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는 온화함이 자리를 잡을 장소가 없습니다. 온화한 사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태오 12:20). 온화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강점과 약점에 모두 마음을 쓰고,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하기보다는 함께 있으려 합니다. 온화한 사람은 사뿐히 걷고, 주의 깊게 들으며, 다정하게 쳐다 보며, 공손하게 어루만지는 사람입니다. 온화한 사람은 진정한 성장에는 힘이 아니라 가르쳐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온화함으로 옷 입지 않으시겠습니까? 각박하고 또 때로는 굽힐 줄 모르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온화함을 통하여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보살핌, 모든 치유의 원천 (Care, the Source of All Cure)

   보살핌은 치유와는 다른 말입니다. 치유는 '변화'를 뜻합니다. 의사, 변호사, 목회자, 사회 복지 요원과 같은 이들은 모두 자신의 전문가적인 기술을 이용해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내는 어떤 종류의 치유책이든 그것에 대해 사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치유는, 바람직한 것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보살핌에서부터 자라서 나오지 않을 때는 쉽게 과격해지고, 조작적이며, 심지어 파괴적으로까지 바뀔 수 있습니다. 치유는 같이 있어 주는 것이고, 같이 울어 주는 것이며, 같이 고생하고, 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치유는 측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인간적이며, 죽을 수밖에 없고, 취약한 나의 형제자매라는 것이 진리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보살핌이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이 될 때, 치유를 선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치유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언제나 보살필 수는 있습니다. 보살피는 것은 바로 인간답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를 주고받기 (Giving and Receiving Consolation)

   위로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이 말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함'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마음을 쓰며 돌보는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흔히 우리는 직면한 무한한 고통을 덜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기를 잃은 어머니, 에이즈에 감염된 젊은이, 집이 불타버린 가정, 부상당한 군인, 자살을 기도한 십대 청소년들, 그리고 왜 지금까지 살아 있어야 하는지 의심하는 노파를 위로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위로하는 것은 고통을 가져 가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함께 있으면서,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우리는 모두 위로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올바르게 죽기 (Dying Well)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게 됩니다. 이 점은 우리들이 확실히 알 수 있는 몇 가지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올바르게 죽을 수 있을까요? 올바르게 죽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 우리가 두고 떠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생애를 풍만하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앞으로 남은 생애에 내가 아직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아니라, "내 다음 세대들을 통하여 나의 생명이 계속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나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훌륭히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사랑의 영을 친구들에게 보내셨으며, 친구들은 그 성령과 함께 함으로써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을 떠날 때 우리도 그들에게 사랑의 영을 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너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우리가 올바르게 죽는 것을 준비하기만 한다면, 죽음은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하는 말 (Words That Create)

   말, 말, 말. 우리 사회는 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광고판의 말, 텔레비전 화면 속의 말, 신문과 책 속의 말, 속삭이는 말, 소리치는 말, 노래하는 말, 움직이고, 춤추고, 크기와 색깔이 달라지는 말. 말은 "나의 맛을 보렴. 나의 냄새를 맡아 보렴, 나를 먹어 보렴, 나를 마셔 보렴, 나와 함께 잠을 자 보렴."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말은 "나를 사 보렴(buy me)"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응, 그래, 그저 말들이로구먼"이라고 재빨리 대꾸합니다. 그리하여 말은 그 힘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창조하십니다. 하느님이 "빛이 있어라."(창세기 1:3) 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빛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에게는 말씀과 창조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말씀의 창조적인 힘을 되찾아야 합니다.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리고 그것을 진심에서 말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새 희망을, 그리고 새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나는 당신을 미워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킬 수 있습니다. 말을 조심해서 하십시오.

함께 춤출 수 있는 공간 만들기 (Creating Space to Dance Together)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그 외로움을 없애 줄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의 외로운 가슴은, "제발 나를 안아 주세요. 나를 어루만져 주세요. 나에게 말을 붙여 주세요. 나에게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곧 우리는 우리의 외로움을 없애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우리의 이 요구를 들어줄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 이 사람들은 우리의 요구에 압도되어 우리를 절망 속에 버려 둔 채 달아나 버립니다. 우리가 외로움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 성숙한 인간관계는 발전될 수 없습니다. 외로움 때문에 서로 매달리는 것은 서로 숨 막히게 하고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용기와 이 공간에서 우리가 함께 춤출 수 있다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고독을 찾아서 (Finding Solitude)

   모든 인간은 혼자(alone)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우리가 느끼는 것과 똑같이 느끼지 못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지 못하며, 우리가 행동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하지 못합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밖에 없는 (unique) 존재이며, 혼자 있음(aloneness)은 우리의 하나밖에 없음(uniqueness)의 다른 면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혼자 있음을 외로움(loneliness)이 되게 내버려두느냐, 또는 그것이 우리를 고독(solitude)으로 인도하도록 허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고독은 평화스러운 일입니다. 외로움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 속에서 남에게 매달리게 하고, 고독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존재의 독특성을 존경하게 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내게 합니다. 우리의 혼자 있음을 외로움이 되지 않게 하고 고독으로 성장하게 하는 일은 평생에 걸친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위해서는 누구와 함께 있을 것인지,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그리고 언제 조언을 구할 것인지에 관하여 의식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현명한 선택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사랑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고독을 찾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희구함 (Yearning for Perfect Love)

   우리가 외로움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할 때, 우리의 행동은 쉽게 과격해집니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욕구 때문에 많은 폭력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외로움에서 충동을 느껴 우리가 사랑을 추구할 때, 키스는 물어뜯는 것으로, 애무는 주먹질로, 부드러운 시선은 의심하는 눈길로, 귀담아듣는 것은 엿들음으로, 그리고 감정의 항복은 성폭행으로 이끌리고 맙니다. 사람의 마음은 아무 조건이 없는, 한계와 제약이 없는 사랑을 희구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도 그런 사랑을 제공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요구할 때마다 우리는 폭력으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비폭력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완전한 사랑을 희구하는 우리의 불완전한 마음은 오직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그런 사랑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우리는 시작해야 합니다.

고독의 정원에서 들리는 소리 (The Voice in the Garden of Solitude)

   고독은 사랑을 갈구하는 우리들 마음의 정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홀로 있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것은 쉬지 못하는 우리의 몸과 걱정에 찬 우리들 마음의 고향입니다. 고독은 그것이 어떤 실제의 장소와 결부되어 있든 아니든, 우리의 영적 생활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독은 우리가 쉽게 있을 수 있는 장소는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도 불안정하고 걱정에 차 있기 때문에 눈앞의 만족을 약속하는 것에 쉽게 현혹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고독은 당장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독할 때 우리는 악마와 탐닉, 욕정과 분노의 감정과 마주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승인을 받고픈 강한 욕구와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독에서 도망쳐 나오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우리들은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수 있도록 인도할 것이다." 늘 고독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고독으로 지탱되는 공동체 (Community Supported by Solitude)

   고독은 고독을 영접합니다. 그것이 공동체에 관한 전부입니다. 공동체는 더 이상 우리가 혼자 있는 장소는 아니지만 우리가 서로의 혼자 있음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경건히 영접하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혼자 있음에서 고독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고독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고독 속에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고독은 우리 자신의 심장에 뿌리를 내리게 합니다. 고독은 우리로 하여금 즉각적인 만족을 제공하는 동반자를 애써 찾게 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중심이라고 주장하게 만들고 또한 다른 사람들은 각각 그들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 각자의 여러 가지 고독들은 우리 공동체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튼튼하고 곧은 기둥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고독은 항상 공동체를 강하게 만듭니다.

심장과 같은 우리의 공동체 (Community, a Quality of the Heart)

   공동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긍적적이고 또 어떤 것은 부정적입니다. 공동체는 우리에게 함께 있음으로 인한 안전함과 음식을 나누는 것과 공통의 목적과 그리고 축하의 기쁨을 생각하게 합니다. 공동체는 또한 당파적인 배타성과 그룹 내에서만 통용되는 언어, 자기만족적인 고립, 그리고 낭만적인 천진성 등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동체는 사람의 심장과도 같습니다. 공동체는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고 서로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깨달음으로써 자랍니다. 공동체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우리자신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우리 능력의 열매입니다 (필립비 2:4 참조).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공동체를 만들것인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우리 마음을 내주는 것을 몸에 익히고 살찌게 할 것인가?" 있습니다.

용서, 공동체 생활의 접착제 (Forgiveness, the Cement of Community Life)

   공동체는 우리가 서로를 "일흔 번씩 일곱 번" (마태오 복음 18:21-22) 용서해주겠다는 마음가짐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용서는 공동체 생활의 접착제입니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 주고 우리가 서로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합니다. 그런데 용서해 주거나 또는 용서를 구할 일이 무엇이 있느냐구요? 그러나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서 우리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 완전한 사랑을 줄 수도 없으며 또한 받을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여러 가지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조건 없이 그들과 함께 있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이 끊임없이 방해를 받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말할 수 있는, 또는 말할 수 없는 여러 사정들에 의하여 항상 제약을 받습니다.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를 용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를 받아들이기 (Receiving Forgiveness)

   용서에는 두 면이 있습니다. 용서해 주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용서해 주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용서해 주는 것을 우리가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남의 용서를 받아들였을 경우에만, 우리도 남을 용서해줄 수 있는 내면의 자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용서를 받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당신의 용서가 없이는 나는 우리 사이에 일어난 불편한 관계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용서만이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오직 우리가 용서를 받을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 자유로 가는 길 (Forgiveness, the Way to Freedom)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자신을 해방시키는 행동입니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굴레로부터 우리는 그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나는 당신의 잘못에 대하여 더 이상 당신을 비난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용서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해 주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가 '감정의 손상을 받은 사람'이라는 정신적 부담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한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 사람들을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데리고 다니거나, 더 나쁘게는 무거운 짐이 되어 그 사람들을 끌고 다녀야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적에게 끊임없이 분노하고 그들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며 또 우리의 감정에 상처를 입혔다고 주장하려고 하는 강한 유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또한 자유롭게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로 가는 길입니다.

용서를 통한 상처의 치유 (Healing Our Hearts Through Forgiveness)

   어떻게 우리는 용서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용서해 주려고 하는 상대방이 그 용서를 받아들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용서해 주고 또 용서받는 두 행동의 상호 관계에 의하여 평화와 조화가 창조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해 줄 때 그 용서가 상대방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면 우리는 거의 용서해 줄 수가 없습니다! 남을 용서해 준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내면의 움직임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화냄과 비통함과 그리고 복수에 대한 욕망을 우리의 마음에서 없애고 우리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게 하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용서를 상대방이 반드시 받아들이도록 우리는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거나 또는 받아들일 의사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것 자체를 모르거나 느끼기조차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진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우리 자신뿐입니다. 남을 용서해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입니다.

기억의 치유 (Healing Our Memories)

   용서는 잊어버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할 때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한 기억은 오랫동안 심지어는 한 평생 우리에게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그 기억을 눈에 띄는 표적으로 우리의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의 기억하는 방법을 바꾸어 줍니다. 용서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줍니다. 우리가 우리 부모의 이혼을 용서하고 우리 아이의 주의력 부족을 용서하고 우리가 위기에 있을 때 친구들이 보여 준 불충실함을 용서하고 그리고 잘못된 충고를 한 우리의 의사를 용서할 때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사건들의 희생물이라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용서는 우리 자신의 힘을 깨닫게 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하여 우리가 파괴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용서는 이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이 우리 마음의 지혜를 깊게 해주는 사건으로 변하게 합니다. 용서는 진실로 우리의 기억을 치유합니다.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기쁨 (The Joy of Being Like Others)

   언뜻 보면 기쁨은 서로 다르다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이 칭찬을 받거나 상을 받을 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기쁨을 경험합니다. 당신은 남들보다 더 빠르고 더 영리하고 더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이 상이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매우 일시적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같다는 사실에 숨겨져 있습니다. 즉, 우리는 허약하며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친구로서 동반자로서 그리고 함께 여행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기쁨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엠마누엘이신 예수님의 기쁨,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기쁨입니다.

---------------------------------------------------------------

<헨리 나웬의 영혼의 빵>

   헨리 나웬은 1932년 네델란드에서 태어나 1957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 심리학 연구에 몰두한다. 1964년부터 81년까지는 메닌저 클리닉, 노틀데임, 니메건, 예일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다. 50세를 지나서는 '그리스도의 내리막길'을 좇아 6개월간 볼리비아, 페루 빈민선교를 거쳐 멕시코, 니카라과, 온두라스에서 사역한 뒤 잠시 교수 생활로 되돌아왔다가 말년까지 정신장애우들을 위한 카나다 라르슈 공동체에서 일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석학이자 명문대학교 교수, 가톨릭 사제였던 나웬은 명석한 사고의 작가이자 탁월한 연사였다.

   흔히 '상처 입은 예언자'로 불린 그는 훗날로 갈수록 이성 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편이었다. 그의 글을 보면 자신의 정서적인 말 들이, 깊이 있는 성경 인용과 성경 풀이를 능가하고 있음을 금방 느낄 수 있다. / 옮긴 글

'글 두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중한 오늘 하루  (0) 2011.06.04
지난 일에 미련을 두지말자  (0) 2011.06.03
지금 하라!  (0) 2011.06.02
생각을 씨앗으로 묻으라  (0) 2011.05.31
하루에 한 번씩  (0) 2011.05.30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