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6·25 당시 北인민재판 사진공개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인민재판을 하는 과정을 촬영한 사진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이 6·25전쟁 56주년을 맞아 공개한 이번 사진은 950년 경찰관 23명에 대한 총살을 강요하는 선동 인파가 모처에서 출발하는 모습 (위)과 이들 경찰관이 인민재판에 (가운데), 경찰관들이(아래) 등을 담았다. 이 사진들은 서 사형 언도를 받아 집행장으로 출발하는 장면 군중 앞에서 인민재판을 받는 광경 북한 인민위원회 선전부원 김모 씨가 촬영한 것으로 촬영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 인민재판 사진을 비롯해 6·25전쟁의 다양한 풍경을 담은 사진전 ‘기록사진으로본해방전쟁생활상’이 22∼26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층 로비에서 열린다.
헐벗고 굶주리고 차이고…
그래도 살아내야만 했다
미군의 네이팜탄에 온몸이 데인 여성들이
응급구호소에 모여 있다. 1951년 수원.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서울 거리를
한 아낙네가 보따리를 이고 지나고 있다.
총, 폭탄, 탱크, 공습 그리고 주검. 전쟁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선의 일부. 후방의 민중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차이고, 폐허 속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살아내야만 했다.
한국전쟁 61돌을 앞두고 전쟁 사진 230점이 공개됐다.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눈빛 펴냄)로 묶은 이 사진들은 소설가 박도씨가 지난해 11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을 뒤져서 찾아낸 480점 가운데 일부다. 미군 또는 미 정부 소속 종군사진가들이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에는 한국전 당시 전선의 뜨거운 공방과는 다르지만 또다른 생존경쟁이 생생하게 담겼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산하, 마을, 집. 바닥으로 떨어진 비참한 가운데서도 가족의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어머니들은 거리로 나서야 했다. 특히 가장 상처받기 쉬운 어린이들은 위문대로, 하우스보이로, 구두닦이로 호출당해야 했다.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