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글 두레 2011. 6. 3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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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漂浪一生嘆 (표랑일생탄)

 

鳥巢獸穴皆有居 顧我平生我自傷

조소수혈개유거 고아평생아자상

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四方

망혜죽장로천리 수성운심가사방

 

새도 집이 있고 짐승도 집이 있어 모두 거처가 있건만

거처도 없는 내 평생을 회고해보니 이내 마음 한 없이 서글프구나

짚신신고 죽장 짚고 가는 초라한 나의 인생여정 천리길 머나먼데

 

 

김삿갓이 여러 고을을 방랑하던 중

한 서당에 도착하게 되어

물이나 한 모금 얻어 마실까 하였는데

훈장이 김삿갓의 용모를 보고 대꾸도 안하자

그 즉석에서 지은 한시를 보면 얼마나

한문을 자유로이 다루었는지 짐작이 간다.

 

書堂乃早知 서당내조지

學童諸未十 학동제미십

房中皆尊物 방중개존물

訓長來不謁 훈장내불알

 

서당에 당도했으나 (내가 온 것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하였구나.

배우는 아이들이 모두 열이 채 안되고,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존귀하구나.

훈장이 나와서 (나를) 내다보지도 아니 하는구나

 

 

각박한 인심을 풍자하며 파격적인 한자를 쓴 그의 시는

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 같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스무(二十) 나무 아래 서러운(←설흔) 나그네,

망할(←마흔)놈의 집에서 쉰(五十) 밥을 먹는구나,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있는가.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 밥을 먹으리.

 

 

김삿갓 묘소로 들어가는 계곡 길가 구절초 꽃밭에

구절초가 피기 시작하여 자신들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계곡이 크지는 않지만 절벽처럼 높이 솟은

바위산과 맑은 물로 마음을 잡았다.

 

我向靑山去 (내 청산을 향해가거늘)

綠水爾何來 (녹수야 너는 어디서 오느냐)

동그란 강돌을 주워다 정성스럽게 쌓은 탑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파격시(破格詩)

天長去無執 (천장거무집 ▶ 천장엔 거미집)

花老蝶不來 (화로첩불래 ▶ 화로에 곁불내)

菊樹寒沙發 (국수한사발 ▶ 국수 한 사발)

枝影半從池 (지영밤종지 ▶ 지렁이 반 종지)

江亭貧士過 (강정빈사과 ▶ 강전 빈 사과)

大醉伏松下 (대취복숭아 ▶ 대추 복숭아)

月移山影改 (월리산녕개 ▶ 워리 사냥개)

通市求利來 (통시구리래 ▶ 통시엔 구린내)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들어 나비는 오지 않네.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달이 기우니 산 그림자 바뀌고

시장을 통해 이익을 챙겨 오네.

 

뜻으로 보면 자연을 누비던 자신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읊은 것이지만,

글자를 우리말 음으로 읽으면 돈이 없어 세상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가난'의 참상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竹詩 죽시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차죽피죽화거죽 풍타지죽랑타죽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粥

반반죽죽생차죽 시시비비부피죽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빈객접대가세죽 시정매매세월죽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만사불여오심죽 연연연세과연죽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치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며

옳음 것 옳다, 그른 것 그르다 저대로 부치세.

손님 접대는 가세(家勢)대로 하고

시정(市井) 매매는 시세대로 하세,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인 김병연이 다섯 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당시 선천부사였던 그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군에게 항복하였고

이듬해 난이 평정된 후 김익순은 처형당하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영월군

와석리 깊은 산중에 숨어살게 되었다.

김병연이 20세 되던 해인 1827년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할아버지의 행적을 모르고 있던 그는

김익순의 죄상을 비난하는 글을 지어

장원급제를 하게 된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로부터 숨겨왔던

집안내력을 듣게 되었고 역적의 자손이라는 것과

조부를 비판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탄 자신을 용서할 수 가 없었다.

하늘이 부끄러워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던 그는

아내와 아이와 어머니를 가슴 아픈

눈물로 뒤로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으니...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 채 세상을 비웃고 인간사를 꼬집으며

정처 없이 방랑하던 그는 57세 때 전남 화순땅에서 객사하여

차남이 이곳 와석리 노루목에 모셨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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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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