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사람 팔자(八字) 변화(變化)의 수(數)는 물든 의식(意識)으로는 참 알 수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복(福)인 줄 알았는데 복이 아니었구나. 화(禍)(禍)인 줄 알았는데 그게 복이었구나.
인간만사(人間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한다. 잘 된다고 앞으로도 계속 잘된다는 보장이 없고, 안된다고 앞으로도 계속 안 될 거라는 보장은 없는 셈이다. 화든 복이든 어차피 지어놓은 그것에 관한 결과로써 오는 것이라면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置簿)해서 손 놓고 기다린다면 그것은 자기의 인생(人生)을 스스로 숙명(宿命)으로 전락(轉落)시켜 버리는 꼴이 된다.
숙명(宿命)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자기의 인생 팔자는 숙세(宿世)의 업(業)으로 인해서 정(定)해져 있기에 어떻게 해서도 바꿀 수가 없다´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서양 종교에서는 ´숙세의 업´이 아닌 어떤 초월적인 절대자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이미 숙명(宿命)적이라면 공부할 필요도 없고, 수행(修行)할 필요도 없고, 애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숙명이 되겠지만, 운명(運命)으로 받아들인다면 운명적인 것이 된다. 운명(運命)이란 말 그대로 명(命), 즉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운전(運轉)해 간다는 말이다. 자기가 운전해 가는 것이기에 운전하는 주체(主體), 즉 자기 자신의 상태나 수준에 따라서, 그리고 운전해 나가려는 방향과 열정(熱情)에 따라서 자기의 인생(人生)은 달라진다.
부처님께서는 인과법(因果法)을 말씀하셨다. 세상사(世上事)의 이치(理致)는 인과(因果) 아닌 것이 없다고 하셨다. 따라서 오늘날의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 대한 결과물(結果物)이라고 한다. 미래의 ´나´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과정에 대한 결과물이 될 것이다. 이렇듯 이 세상의 이치가 인과(因果)라는 원리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은 참으로 냉정하고도 무서운 사실이다.
지금의 ´나´는 남보다 못할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다. 반대로 뛰어날 수도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차이는 이미 어느 정도 가지고 나왔다. 현재의 내 의식 속에는 이전 삶에 대한 기억(記憶)이 있지 않기에, 나의 무엇이 그런 차이를 있게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알든 모르든 원인(原因)이 있기에 그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태어난 뒤로 세월이 흘렀다. 사람에 따라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 그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왔던 그 차이를 얼마나 메워 왔고, 키워왔는가? 즉, 태어날 때의 나라는 결과물을 가지고 얼마나 잘 운전했는가? 그래서 나쁜 차이는 얼마나 줄여 왔고, 좋은 차이는 얼마나 키워 왔는가? 나 자신을 부정적(否定的)으로 몰아 왔는가? 긍정적(肯定的)으로 키워 왔는가? 떠밀려 왔다면 제대로 운전해 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숙명(宿命)과 운명(運命).
난 이 두 단어를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라고 본다. 하지만 ´명(命)´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숙명적(宿命的)인 삶이 될 수 있고, 운명적(運命的)인 삶이 될 수 있다. 숙명과 운명으로의 갈림은 나에 의해서 나뉘게 된다는 것이다.
떠밀려 가는 삶은 숙명(宿命)이지만, 이끌고 가는[운전해가는] 삶은 운명(運命)이다. 떠밀려 가고 있는가? 이끌고 가고 있는가? 내 삶의 주인(主人)은 나인데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 객(客; 손님) 노릇하고 있는가? 이왕이면 주인으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 옛 스님들은 항상 ‘수처작주(隨處作主)´*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어느 곳에 있던지 주인이 되어 살아간다´라는 말)
그런데 주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그럴 수 있는 자신(自身)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자기 닦음의 공부, 즉 수행(修行)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Zheng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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