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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아프리카에 희망을 심은 성자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



감곡매괴성모성당.......

이태석 신부는 생을 향한 마지막 희망을 이곳에서 찾고자 했다 2009년 12월....



2009년 12월, 공기의 작은 흔들림에도 귓불과 코끝이 이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날씨가 매서웠다.

그날 충북 음성에 위치한 외진 시골성당으로 한 젊은 신부가 찾아들었다.



병색은 완연했다.

눈은 움푹 들어갔고, 광대뼈는 툭 불어졌으며,

배는 복수로 심하게 부풀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한 걸음도 제대로 떼기 힘든 모습이었다.

당시 그곳, 감곡 매괴성모순례지 성당에서는

김웅렬 주임신부의 주례로 정기적으로 열리는 순례 미사와

함께 치유의 시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성당은 몸과 마음에 치유의 빛이 내려진다고 알려져 수많은 순례객이 찾는 곳이다

김웅렬 신부는 처음 만난 그 젊은 신부와 함께 미사를 집전했다.



젊은 신부는 미사 시간 내내 힘겨워했다.

서있을 힘조차 없어 보였다.

미사시간을 버틴 것만도 기적에 가까웠다.

미사를 간신히 마친 젊은 신부는 제의실에 들어가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김신부를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신부님,

저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활동하던 살레시오 수도회 신부입니다.

저는 의사이기도 합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뒤에

수단에 가서 8년 동안 일하다가 휴가를 내어 고국에 왔는데,

우연히 검진을 해보니 이미 말기 암이라고 합니다."



김웅렬 신부는 안타까운 눈으로 젊은 신부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젊은 신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신부님 정말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지에도 오고 싶었습

니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이곳에 왔습니다."



김웅렬 신부는 젊은 신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젊은 신부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신부님은 기도로 저를 고치실 수 있습니다.

이곳에 오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아프리카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돌아가 그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 아이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젊은 신부는 의사였기에

자신의 병이 위중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현대 의학의 힘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한겨울의 찬바람을 뚫고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마지막 희망을 안고 치유의 기도를 받기 위해 김웅렬 신부를 찾았다.

그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눈에 어른거려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김웅렬 신부는 젊은 신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복수로 부풀어 오른 배에도 손을 올렸다.

그리고 기도했다.

찌릿한 아픔이 밀려왔다.

김신부는 이 젊은 사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하지만

젊은 사제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반드시 살아서 아프리카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생을 향한 강한 의지를 보이는 그에게

김신부는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저 마음으로 안타까움을 전할 뿐이었다.



'신부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시라고 성모님께서 이곳으로 불러주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죽는 모습도 당신을 닮으라 하십니다.'



그때였다.

젊은 신부가 울음을 터뜨렸다.

움푹 꺼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김신부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젊은 신부와 함께 온 가족들이 김신부에게 말했다.



"살 수 있겠죠?"

김신부는

'죽음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대신

"기력을 되찾으면 다시 한 번 찾아오세요."

라고 말했다.

러자

젊은 신부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가족들의 부축을 받고서 성당을 떠났다.



그날,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성당을 찾은 젊은 신부의 이름은

'이태석'이었다.

의대를 졸업한 뒤 의사로서의 영화를 버린 채

사제의 길을 택하고 내전으로 피폐해진 절망의 땅에서8년째 의사로서,

그리고 사제로 일해오고 있었다.

이태석 신부는

아프리카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차마 두고 떠날 수 없어 마지막 희망을 안고그곳을 찾은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2010년 1월 15일 새벽,

김웅렬 신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식을 접했다.

이태석 신부가 선종했다는 소식이었다.

"병이 깊어져 다시 신부님을 방문하기 힘드니

제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이태석 신부가

마지막으로 연락을 해온 것은 선종 보름 전 이어었다.

현실을 모두 받아들인 듯 한 편안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별도로 시간을 내서 서울까지 간다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또 그해 겨울엔 유난히 궂은 날이 많았다.

'더 늦기 전에 빨리 가야 할 텐데.'

이태석 신부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바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 이틀 서울행이 미루어졌다.

안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이태석 신부의 선종 소식을 듣고만 것이다.



결국 이태석 신부는

김신부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하늘로 떠났다.

김웅렬 신부는

그날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각에 차를 몰고 서울로 향했다

.



보라매공원 근처 살레시오 회관에 차려진

이태석 신부의 빈소를 찾았을 때는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빈소는 이튿날 치러질 장례미사 때문에 이미 치워져 있는 상태였다.



김신부는

제의를 입고 털모자를 쓴 채

누워 있는 이태석 신부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평온했다.

잠시 기도를 드린 김 신부는

조용히 누워있는 이태석 신부에게 다가가 얼굴을 만지며 말을 건냈다.



"신부님 애썼습니다.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웃고 계시겠구려.

사제생활 10년을 못 채우고 갔지만

당신의 10년은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한 삶이였습니다.

그 나이에 어찌 그 험한 곳에 가서 살 결심을 했으며,

그 많은 어려움을 견뎌냈습니까?

장하십니다.

잘 가십시오.

가서 천상의 어른들 만나거든

내 이야기 좀 잘 말해 주세요.

살아 있을 때 못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내일 장래미사 때 올 수 없습니다.

지금 와서 얼굴이라도 보니 다행입니다.

저를 찾아왔을 때

'신부님 살 수 있습니다. '

라고 말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차라리 30년 가까이 사제 생활을 한 내가 가고

그대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입니다.

삶이란 돌아보면 짧고도 허망하게 흘러가는 것,

나도 언젠가 그대처럼 그 모습으로 누워있을 겁니다.

이태석 세례자 요한 사제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김웅렬 신부는 밤길을 되짚어 시골 성당으로 돌아왔다.

이태석 신부를 마지막으로 배웅하고 돌아오던 그 길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길이였다.

그 기쁨은 영원한 생명 속에서

다시 이태석 신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다른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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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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