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에서
1. 산을 향한 내 마음이 너무 깊어서 산에 대한 이야기를 섣불리 하지 못했다 . 마음에 간직했던 말을 글로 써 내려고 하면 왜 이리 늘 답답하고 허전해지는 걸까 .
2. 나무마다에 목례를 주며 산에 오르면 나는 숨이 가빠지면서 나의 뼈와 살이 부드러워지는 소리를 듣는다 . 고집과 불신으로 경직되었던 나의 지난 시간들이 유순하게 녹아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
3. 산에서는 시와 음악이 따로 필요 없다 . 모든 존재 자체가 시요 음악인 것을 산은 나에게 조금씩 가르쳐 준다 . 날마다 나를 길들이는 기쁨을 , 바람에 서걱이는 나무 잎새 소리로 전해 주는 산 .
4. 내가 절망할 때 뚜벅뚜벅 걸어와 나를 일으켜 주던 희망의 산 . 산처럼 살기 위해 눈물은 깊이 아껴 두라 했다 . 내가 죽으면 편히 쉴 자리 하나 마련해 놓고 오늘도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는 산 . 살아서도 남에게 잊혀지는 법을 처음부터 잘 익혀 두라 했다 . 보고 나서 돌아서면 또 보고 싶은 기다림의 산 .
5. 산에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 돌과 나무와 이끼처럼 그의 품에 안겨 기도할 뿐이다 . 소나무 빛 오래된 나의 사랑도 침묵 속에 깊어진 것을 나는 비로소 산에 와서 깨닫는다 . 산을 닮은 한 분을 조용히 생각할 뿐이다 .
6. 깊은 산 옹달샘에서 물을 떠 마시며 문득 생각하네 , 사랑은 자연 그대로의 물맛인 것을 . 물 위에 그리운 얼굴 하나 떠올리며 또 생각하네 ,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물맛인 것을 .
7. 노래하는 마음으로 풀꽃을 따면 옷에도 가슴에도 풀물이 드네 . 풀독이 오른 내 하얀 오른팔 위에 찍혀 있는 눈부신 아침 . 내 영혼의 속살까지 풀물이 드는 첫 기쁨이여 .
8. 시 ( 詩 ) 를 노래하면 새가 된다고 - 산에서 나와 눈길이 마주친 한 마리의 귀여운 새가 일러 준 말 . 쓰지 않고 품기만 해도 빽빽한 일상의 숲을 가벼운 몸짓으로 날아갈 수 있다고 오늘 아침 산에서 만난 자유의 새가 일러 준 말 .
9. 산에서 비에 젖은 바위를 보면 , 어린 시절 친구들과 산에 올라 꽃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큰 비를 만나 울면서 울면서 산을 내려왔던 일이 생각난다 . 그때는 산이 참 무서웠다 . 그때 나와 함께 산에 갔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 그들도 비 오는 날의 산을 보면 문득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기억하며 궁금해 할지도 몰라 .
10. 그 누구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될 때 그 마음을 묻으려고 산에 오른다 . 산의 참 이야기는 산만이 알고 , 나의 참 이야기는 나만이 아는 것 . 세상에 사는 동안 다는 말 못할 일들을 사람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품고 산다 . 그 누구도 추측만으로 그 진실을 밝혀 낼 수는 없다 . 꼭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기 어려워 산에 오르면 산은 침묵으로 튼튼해진 그의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 준다 . 좀 더 참을성을 키우라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
11. 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시커먼 연기에 그을린 도시의 얼굴을 씻겨 주고 싶다 . 나도 모르는 새 정이 든 이 항구 도시에서 같은 배를 타고 사는 이웃의 목마름을 축여 주고 싶다 . 산에서는 바다가 더욱 가까이 있다 . 잊었다가 다시 만난 옛 친구의 낯익은 얼굴처럼 . / 이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