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설악에 눈 내리면
한 폭 수묵화가 된다
고고해지기 위해서
길이란 길 모두 덮고
존재의 길을 지우듯
쏟아지는 저 폭설.
누가 저 산사에
흰 수(繡)를 놓는 건가.
적설의 계곡에서 아찔하게
헛디디면 오로지 은사시나무 잎만
바람에 흔들리느니.
몸 지쳐 고개 드니
둥그렇게 떠 있는 달
무시로 몸속에서
얼음꽃이 피어나고
한 번쯤 폭설 속에서
헤매는 것도 生임을 알았다.
/정성욱(1963~)
눈은 역시 설악(雪嶽). 겨우내 백설이 만건곤할 내설악은 적설의 깊이가 다르다. '수묵화'니 '흰 수를 놓는' 듯한 고전적 미감도 어울리는 고즈넉한 곳. 깃들고 싶도록 청정한 눈이 마음을 막 잡아끈다. '잠들기 전에 가야만 할 먼 길'(로버트 프로스트)이 저 어디 있다는 듯.
아무리 밟아도 진창이 되지 않는 순결한 길. 백담(百潭)을 품은 절에 무금선원(無今禪院)까지 있으니 헤매기엔 그 이상이 없겠다. '무시로 몸속에서 얼음꽃'을 피우듯 자신을 치며 거듭날 때, 무문(無門)의 문고리도 잡을 수 있을까. '한 번쯤 폭설 속에서 헤매는 것도 생임을' 깨닫듯, 끝까지 헤맨 발이 돌아와 걷는 시정의 길 맛도 더 알게 될까.// 정수자·시조시인/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