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의 그늘이 깊다. 흔들리며 한 해를 건너왔다. 장유(張維·1587~ 1638)가 제 그림자를 보며 쓴 시 '영영(詠影)' 한 수를 위로 삼아 건넨다. "등불 앞 홀연히 고개 돌리니, 괴이하다 또다시 날 따라 하네. 숨었다 나타남에 일정함 없고, 때에 따라 드러났다 그늘에 숨지. 홀로 가는 길에 늘 동무가 되고, 늙도록 날 떠난 적 한번 없었네. 참으로 몽환(夢幻)과 한 이치임을, 금강경 게송 보고 알게 되었네.(燈前忽回首, 怪爾又相隨. 隱見元無定, 光陰各有時. 獨行常作伴, 到老不曾離. 夢幻眞同理, 金剛偈裏知.)"
등불을 뒤에 두고 앉자 내 앞에 내가 있다. 내가 고개를 돌리니 저도 돌린다. 반대로 돌리자 저도 똑같이 한다. 그는 등불 앞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달빛 아래 홀로 가는 밤길에도 그는 나의 길동무였다. 벗과 가족이 나를 떠나도 그는 늘 내 곁을 지켰다. 그를 잊고 지낸 내가 부끄러워 머리를 긁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여보게, 주인공! 나 여기 있네. 자네에겐 내가 잘 안 보여도 나는 자네를 늘 지켜보고 있었지. 한 해 동안 정말 애썼네. 우리 또 한 번 기운을 내자고. 자꾸 허망한 것들에 마음 두지 말고 실답게 살아야지. 작위하지 말고 순리에 따라 사세나."
7, 8구는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사여게(四如偈)'를 두고 한 말이다.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꿈이나 환영(幻影) 같고 거품이나 그림자 같은 것. 이슬 같고 번개와도 같나니, 응당 이같이 살펴야 하리.(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인간의 욕망이란 허깨비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흔적 없는 물거품, 그늘에선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다. 풀잎 끝의 아침 이슬과 허공의 번개는 금세 사라진다. 사람들은 꿈을 좇아 허깨비를 따라, 물거품 같고 아침 이슬 같은 허상을 뒤쫓느라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더도 덜도 말고 똑 요렇게 보아라. 삶이 매뉴얼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름껏 열심히 달려온 인생들이 쥔 것 없는 빈손으로 벽 위 제 그림자를 보고 있다. "그래, 그림자 친구! 자네도 수고가 많았네. 참 고마우이. 내년에도 똑같이 나를 지켜주게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도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