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시 무슨
언약이 있기라도 한가부다
산자락 강자락들이 비단 필을
서로 펼쳐 서로들 눈이 부시어
눈 못 뜨고 섰나부다.
산 너머 어느 산마을
그 언덕 너머 어느 分校
그 마을 잔치 같은 운동회 날
갈채 같은 그 무슨 자지러진
일 세상에는 있나부다.
평생에 편지 한 장을
써본 일이 없다던 너
꽃씨 같은 사연을 받아
봉지 지어 온 걸 봐도
천지에 귓속 이야기
저자라도 섰나부다.
/정완영(1919~2016)
한국적 가락으로 한국적 정서의 경계를 높여온 시인. '비단 필'에 '갈채'까지 얹던 가을을 두고 떠났다. 일찍이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조국')로 벌거숭이 조국을 '줄 고르'더니 '내 고향 하늘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고향 생각')으로 집 떠난 마음들을 울렸다. 그 '손'에 닿으면 이 땅의 숨탄것들은 서러운 하늘을 열고 수척한 소리를 얻고 그리움의 깊이를 앓았다. 그런 굽이마다 그린 김천 선영에서의 첫 가을. 김천(金泉)의 '백수(白水)'('泉'을 풀어 지은 호)로 돌아갔으니 별들도 갈채를 보내리. '한국시의 종가(宗家)'라던 시조 한생에 '눈이 부시어' 하늘도 더 푸르리. 게서도 지상의 귓속 이야기로 꽃씨 봉지 하마 지으실까… //정수자 시조시인/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