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이 피던 날 아직 발이 시린 이월 어느 날 아침 수증기 서린 유리창 앞에 푸른 도포 차림의 선비 세분이 상아로 세공한 부채를 들고 말없이 단아하게 서 계셨다 나는 너무 황망하여 어쩔 줄 모르고 버선발로 뛰어나가 허리 깊이 꺾고 절하였다 그 청아함에 눈부시어 감히 반가운 악수도 청하지 못한 채. /홍윤숙(1925~2015) 시인은 막바지에 이른 겨울의 끝에서 난 꽃이 피어난 일의 경이를 이렇게 시로 썼다. 단정하고 아담하게 핀 꽃의 자태는 선비의 외양과 태도에 견주어지고 있다. 고요한 성품의 난은 속된 티가 없이 맑은 꽃을, 상앗빛 꽃을 어느 날 아침 피워 올렸다. 설한(雪寒)을 견뎌낸 후의 꽃핌이니 그 향기는 얼마나 진할 것인가. 너무나 반가워 미처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가 난 꽃을 맞아들이는 시인의 성정 또한 고아하고 아름답다고 아니할 수 없다. 홍윤숙 시인은 "시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변경의 파수꾼이었다. 후미지고 버림받은 위난의 땅을 지키는 파수꾼이다"고 말했다. 온갖 세사(世事)가 위중할 때에 이 시를 읽으니 소란스럽고 격앙된 것이 진정되는 느낌이다.// 문태준 시인 /조선일보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