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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유명화가 5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1916~1956) 화가

 

 

이중섭의 생애

 

1-1916410일 평안남도 송천리에서 태어나다.

141929년 오산학교에 입학하다. 임용련 선생님께 미술을 배우며 재능을 인정받다.

21-1936년 일본 분카학원 서양화과에 입학하다.

23=1938년 제2회 지유텐에 소묘를 출품하여 혐회상을 받다. 일본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 를 받다.

28-1953년 제8회 지유텐에 망월을 출품하여 태양상을 받다.

30=1945년 원산에서 마사코와 결혼하다.

31-1946년 첫아들을 낳았으나 병으로 세상을 떠나다. 그뒤부터 아이들을 더 많이 그리다.

35-1950년 어머니와 이별하고, 아내와 아이들만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하다.

36-1951년 가족과 함께 제주도 서귀포로 건너가다. 12월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판잔집에 서 어렵게 생활하다.

37=1952년 아내의 건강이 나빠져 가족들을 일본 도쿄로 보내다.

38-1953년 선원증을 빌려 도쿄로 건너가 일주일 동안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다.

39- 1954년 경상남도 통영에 머물면서 풍경화를 많이 그리다.

흰소, 노을앞에서 울부짖는 소 등 훌룡한 소그림을 여러 점을 완성하다.

서울에 와서 개인전을 준비하다. 대한 미술협회전에 달과 까마귀를 출품하여서 좋은 반 응을 얻다. 은박지 그림이 미국 근대 미술관에 소장되다.

40-19551월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5월에 대구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나 은박지 그림 이 철거되는 소동으로 충격을 받고 건강이 나빠지다. 병 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하다.

41- 195696일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다가 1956년 간염으로 적십자 병원에서 죽었 다.

 

이중섭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만큼 유명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럼에도 다시 조명해 봄은 이 글을 통해 화가와 그 정신의 산물인 그림을 이해하고 조금이라도 더 미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길 바라기 때문이다.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그야말로 국민화가라는 호명에 걸맞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대중 화가이다. 얼마 전 필자가 몸 담은 미술월간지에서 우리나라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가장 잘 알고 있는 미술인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약 70% 이상이 이중섭을 알고 있다고 할 만큼 그의 대중적 인지도는 상당하다. 하지만 폭넓은 사랑을 받는 인기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의 예술세계는 그의 비극적인 생애에 가려 제대로 조명되지 않아왔다.

 

1916년 평남 평원군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세상에 남긴 삶의 발자취라야 고작 40년이다.

 

빈곤과 절망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는 이중섭이지만 그가 처음부터 가난하고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로서는 여간해서 어려웠던 일본 유학도 다녀왔을 만큼 여유가 있었으며 민족주의자이자 선각자였던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를 만나 누구보다 먼저 신지식을 습득했던 혜택 받은 자이기도 했다.

 

살아생전 화단의 평판도 좋았으며 1938년 이후 각종 상을 휩쓸면서 천재라는 타이틀을 획득함은 물론 촉망받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기도 했다.

 

그런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내외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일본강점기에 겪어야 했던 민족감정과 울분, 모든 것을 해체시켜버린 6.25 동란, 월남하며 거처도 없이 떠도는 과정에서 떠나버린 일본인 아내와 아들의 사망, 그리고 가난. 그 모든 것들이 인간 이중섭을 괴롭혔지만 그러한 수난들이 없었다면 그의 인간애적인 부분은 보다 희석되었을 지도 모른다.

 

 

소와 아이들을 사랑한 화가

 

5세 이후 어릴 적부터 고구려시대 고분에 들어가 벽화를 바라보며 화가의 꿈을 키웠던 이중섭은 가난에 절어 절망하던 순간까지도 그림을 놓지 않았던 인물이다. 놀랍게도 민족동란의 참혹함 속에서도 그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는 판잣집 골방에서 콩나물시루처럼 웅크린 상태에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이나 부두에서 일하다 말고도 그렸다. 잘 곳이나 먹을 것이 없어서 그렸으며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면 못이나 연필로 그렸다. 때론 허무해서 또 때론 외로워서도 그렸다. 피난시절 세상을 전전하면서도 유화 2백여 점과 은지화 3백여 점 등 총 5백여 점의 작품들을 그렸다. 이 같은 사실들은 그에게 있어 그림은 곧 생존과 생활과 생애의 전부였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우리가 이중섭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그림들과 1950년부터 52년 사이에 그린은지화정도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현재 생존해 있는 지인들을 만나보면 이중섭은 실제로도 를 참 잘 그렸고 자주 그렸다한다. 그가 소를 그린 이유는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순한 토속성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중섭과 일본유학시절을 함께 했던 한 노 화가는 얼마 전 필자를 만나소에 관한한 누구도 이중섭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며그는 어려서부터 보아온 우직한 소가 좋았고 그것을 그림으로서 자신의 항거적 마음을 강하게 표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를 살던 이중섭이 소를 통해 강한 민족성을 표현했다고 보여 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신병을 앓으며 가난에 허덕였던 말년에 그려진 소에는 분노와 좌절의 느낌이 물씬하다. 이 중 사망하기 2년 전인, 1954년 무렵 그려져 현재 홍익대박물관에 소장 중인 대표작 흰 소는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희 붓질로 된 독특한 작품이다. 검은 빛과 흰빛이 아울러진 거칠고 굵은 붓질은 거의 울분에 가깝다. 마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나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와 흡사하다.

 

헌데 이중섭이 소보다 더 자주 그리고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이다.은지화나타난 아이들이 막연히 1946년 태어나자마자 죽은 첫째 아들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중섭은 원래부터 아이들을 사랑했다. 초창기부터 그의 그림엔 아이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봄의 어린이도 그 중 하나다. 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금속막을 긁어 새기고 연필선으로 메운 것은 상감기법이나 화감암에 새긴 선묘와 연결 지을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민화나 분청사기에 실현된 여러 가지 기법을 종합하여 응용한 그림이기도 하다.

 

이것은 종이에 유채로 그려졌으며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로 유쾌하게 뛰어 놀고 있는 동작들을 담고 있다. 허나 그림과 화가의 삶은 다른 것일까. 원산에 살던 그는 이 당시 부인이 일본인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치부되는 고통을 겪고 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렸다가 일본성이 짙다하여 문초를 받는 등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처지에 놓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중섭은 술을 자주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

 

혼란의 시기를 살던 이중섭은 앞서 말한 작품들 외에도 수 없이 많은 명작들을 남겼다. 아내 마사코가 남편 이중섭의 작품제작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후배인 해운공사 소속의 승무원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받기로 했으나 어김으로써 발생한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준비하던 중 그린 1954년 작달과 까마귀는 휘황한 보름달이 뜬 푸르른 하늘을 배경을 바탕으로 친구를 찾아 모여드는 까마귀를 그린 그림으로 마치 문인화의 진한 먹으로 툭툭 쳐내듯 일획으로 표현된 까마귀들이 인상적이다. 이 그림은 당시 이중섭의 절망과 외로움, 고통 등이 간접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이밖에도 이중섭의 습작성과 마음을 알 수 있는 작품들도 다수에 달한다. 일본어로 쓰인 글 사이사이에 소년들을 아기자기하게 그려 넣은 엽서그림인 화목(1951년경)은 현재 90매 가량이 남아 있는 그의 일본인 아내에게 보낸 편지그림 중 하나다.

 

이중섭이 최초로 보낸 것은 편지가 아닌 엽서다. 1950년 말에 원산에서 보낸 것으로 이 엽서에는 물고기 꼬리를 한 소가 바다에서 솟아나오는 모양을 하고 있다. 화목에서는 이중섭이 황소보다 더 많이 그렸던 아이들이 가득 나온다. 1951년 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수채화와 펜으로 그린 이 편지는 순진무구한 존재의 상징인 어린이를 주제로 사랑과 삶의 사연들이 동심처럼 진득하게 묻어 나온다. 반면 자신이 살아야 했던 혼탁한 현실에서 판치던 변절과 거짓을 극복하고자 하는 갈망의 표현도 깃들어 있다. 이중섭은 1951년 한 해 동안 무려 80점 가량을 아내와 자식들에게 그려 보냈다.

 

절망과 고통 속에 발화한 그림

 

이중섭의 대표작이라는 것들의 대부분은 그가 남하한 이후 그려진, 1956년 사망하기 이전까지의 약 5년 정도 사이의 것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공교롭게도 죽음을 바라보며 걷던 이 5년 정도의 시기가 그림에 있어서는 최대 절정기였다. 39세였던 1954년 그린소와 새와 게를 보면 이중섭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지친소의 모습과 새들의 어수선함은 이중섭의 심적 괴로움과 시대의 암울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 40세이던 1955, 이중섭은 서울 미도파 갤러리와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허무하게 다가오는싸우는 소를 비롯한 유화와 은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을 전시하지만 은지그림이 춘화라고 하여 철거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전시를 해도 그림 값을 떼이기 일쑤였다. 그는 술로 연명하다 빈털터리가 되어 자학과 기진맥진, 이때부터 영양부족과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인다.

 

성가병원에 1, 서울 이종사촌 집에서 머물다가 다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고 또 다시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겼다가 1956년 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곧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들어가 96일 홀로 숨을 거둔 천재화가 이중섭. 이처럼 삶의 절망과 죽음 앞에서 오히려 강하게 불타올랐던 그의 그림들은 완숙미를 더했고, 마음 깊은 곳의 아픔들이 명작으로 옮겨져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림만큼은 행복하게.

 

"나의 사랑하는 남덕군"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40년 짧은 생을 살다간 이중섭. 오는 9월이면 작고 50주년을 맞이 하게 되지만 얼마 전까지도 유족들과 감정협회 간 거세게 일었던 작품진위논란은 그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주변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무엇이든 법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성질머리들을 관찰하며 과연 사후의 이중섭에게 어떤 영광과 의미가 있었는지 되묻게 된다. 그가 남긴 발자취나 생전 그토록 목매어 찾았던 가족들의 이야기는 온데 간데 없고, 또한 미술계 거장으로서, 혹은 사람 냄새 물씬한 그의 인간적인 측면은 도외시된 채 오로지 그를 둘러싼 물욕들이 여기저기서 포착되니 참으로 씁쓸한 노릇이다.

 

인간 이중섭’. 우리는 살아 생전 그가 지녔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창작의 원천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중섭 생전 삶의 희망은 가족에게 있었다. 그림을 비롯한 그의 모든 것의 최종 종착지는 아내 이남덕을 포함한 가족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그는 보고 싶은 가족 곁으로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어 했으며 뼛속까지 사무치는 그리움에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죽어서나 살아서나 고단한 현실은 그를 끝내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물론이고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보냈던, 수없이 많은 편지와 엽서들을 보면 이중섭이 얼마나 가족을 보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언제나 나의 사랑하는 남덕 군에게라는 말로 시작하는 그 편지에는 읽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할 만큼 진한 애정과 번민이 스며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괴로움과 자식들을 보고 싶어 하는 애틋함, 셈이 빠른 사람들로부터 이리저리 채여 생채기 난 상처를 애써 다독거리던 인간적인 아픔들이 눈물이 되어 그의 편지그림들과 글 속에 절절하게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왜 일본에 갈수 없었을까? 피폐한 생활고 때문이었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인 일본으로 떠난 것도 그 이유였다. 이에 그는 돈을 모아야했다. 오로지 전시를 열어 돈을 많이 번 뒤 일본으로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돈을 모아야했다. 지금의 많은 화가들도 그렇지만 그 역시 딱히 다른 재주는 없었기에 그에게 있어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은 그림뿐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중섭이 애타는 마음으로 준비한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둔다. 언론의 호평은 이어졌고 전시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중섭은 비로소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매우 들떴다.

 

그러나 요즘 세태로 볼 때 이중섭은 어수룩했다. 그림은 많이 팔았으나 수금을 하는 데는 젬병 이였기에 이리저리 떼이고 못 받아 막상 이중섭 수중에 들어 온 돈은 별로 없었다. 이중섭은 간절히 바랬던 일본행이 좌초되자 실의에 빠진 채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한다. 더 이상 가족을 볼 수 없다는 커다란 실망감에 사로잡힌 그는 마지막까지 놓지 않으려던 삶을 미련 없이 버리기로 한다.

 

그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정신병원 어느 차가운 병실 귀퉁이에 쓰러져 쓸쓸하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가 추앙해 마지않는 근대미술의 대가 이중섭의 40년 짧은 생애는 그렇게, 애처롭게 막을 내린다. 단편적으로 보면, 그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던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었고 그를 죽인 것은 평소 어지간히도 간수하지 못하던 몇 푼의 돈이었다. 또한 그를 아끼는 주변인들이 그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면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사람들 역시 주변인이었다.

 

문제는 그에게 있어 상처뿐인 돈 이야기가 지금도 심심찮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여전히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중섭의 이름으로 온통 도배되다시피 한다는 사실이다. 까놓고 말해, 얼마 전 법정공방으로까지 번진 이중섭 작품 진위논란을 보면 결국은 돈의 문제요 사람의 문제였다. 여기에 인간 이중섭은 온데간데없다.

 

오로지 경제적 가치로서의 이중섭만 존재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젠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이중섭, 그는 과연 작고 50주년을 앞두고 자신의 초상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일본에서 미술유학중에 만난

일본인후배 마사코와 한국에서 결혼

 

 

 

 

 

 

 

박수근(1914~1965) 화가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현 양구읍) 정림리 출생.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였다. 1932년 제11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등장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 미술협회전람회에서 입상하였다. [1] 1958년 이후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조선일보사 초대전·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미술전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다. 1959년에 제8회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의 작풍은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면 서도 한국적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충실하게 다루었다.

 

1914221.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1932년 독학으로 선전입선

1932- 44년 평안남도청 근무, 평양에서 <주호회> 창립

1945년 금성여중 미술 교사

19526.25 전쟁 중 월남

1953- 64<국전>에 출품하여 수회 특선

<국전>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역임

1957<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서 미술전> 초대 출품

1958<한국회화전>(미국 뉴욕 월드 하우스 화랑) 초대 출품

1959년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전> 초대 출품

196556일 별세

1980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추서

198520주기 기념전(현대화랑)

 

 

노상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박수근의 12세 무렵 소망이라 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2>이란 책을 보면 화가. 박수근을 '선한 이웃을 그린 한국의 밀레'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부족한 말이다.

 

노상의 사람들

 

그 이유는 화풍이 그와 달라서만이 아니라 '박수근' 그 자신 역시 몹시도 선한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도 커서 저렇게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골목안

 

 

그래서인지 박수근의 그림들을 보면 어딘가에서 할아버지의 넓고 아득한 품에 안겨 잠든 채 집까지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인생이 너무나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던 적도 여러 번이였음에도 그의 그림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품격과 함께 천진난만한 손주의 목소리가 듬뿍듬뿍 묻어나는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다.

 

                                              春日

 

 

그의 젊은 시절 생활상 과 평소 가족과의 인간적 관계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편지 한통을 먼저 소개하면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내오니 용서하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의 광산 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 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나무와 두 여인

 

 

5세 때 서당에 다녔고 7세 때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나는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유방암으로 오래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셔서 동생들과 아버지를 어머니 대신 돌봐야 했기에 고학이라도 해서 미술학교를 다니려 하던 꿈은 그만 깨져 버렸습니다.

 

나무와 여인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 번 선전에 입선을 했습니다. 선전(鮮展)에 처음 처녀 입선한 것은 내가 18세 때였습니다.

 

아기업은 소녀

 

 

지금까지 춘천에서 그림공부를 하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오니 부모님께서 윗집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여러 번 거절했습니다. 내가 더 성공해서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부모님께서 하도 권하셔서 나는 당신에 대해 내 동생 원근(元根)이와 동네 사람들에게 알아보았습니다.

 

소녀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하러 같이 갔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일하는 여인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론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굴비

 

 

 

귀여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복숭아

 

 

나는 나 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나의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귀로

 

이 연애편지는 1939년 겨울 춘천에서 고향 양구로 돌아온 그가 자신의 아내가 된 김복순(金福順) 여사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연애편지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처녀는 춘천의 의사집과 급하게 혼례를 추진하게 된다.이에 낙담한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고, 이에 놀란 박수근의 부친은 그 처녀의 집에 가서 담판을 짓게 된다.

 

 

김복순 여사의 부친은 혼례를 승낙하며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화가 박수근은 김복순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녀는 박수근의 처음이며 마지막인 유일한 모델이었고, 사랑이었고 생애의 모든 것이었다.

 

 

                                                                 귀로

 

 

 

박수근의 그림은 거의 독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앞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의 부친은 광산사업을 실패하고 잇따라 전답마저 잃어 그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도록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만큼은 보통학교 시절부터 이미 인정을 받아 일본인 교장 선생은 소년 박수근의 집까지 찾아와서 그에게 그림 연필과 도화지를 사주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을풍경

 

그의 16세 때 일본인 교장 선생은 격려와 함께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해 볼 것을 그에게 권유하였고, 그는 193211회 선전에서 <봄이 오다>로 입선의 영광을 안게 된다. 그러나 그 무렵 그의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몸져눕게 되고 결국 그의 나이 21세 때(1935)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나물캐는여인

 

박수근은 이에 크게 낙담하여 실의에 빠지지만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미술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간신히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할 무렵 그는 위아랫집으로 살던 김복순 여사와 결혼한다. 신혼 초에 직장 생활을 위해 본의 아니게 별거생활을 하게 된 두 사람은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맷돌질 하는 여인

 

이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우체부가 투덜댈 정도였다. 남편 박수근은 평양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편지에 그곳이 몹시 춥다고 쓰자 아내는 자신의 털실 목도리를 풀어 남편의 텔 스웨터를 짜려고 했으나 실이 모자라 조끼를 짜 보냈고 남편은 그에 감격하여 다시 편지를 보냈다.

 

모란

 

화가 박수근의 생애를 살펴보면 문득문득 이 분의 살아온 행적들이 나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그도 아니면 가까운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선한 이웃 어른의 모습들과 중첩됨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을 건사하고, 가난 속에서도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신경 써주는 자상한 아버지. 안으로는 세상의 모든 풍상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막아주면서 정작 당신 자신은 바깥 세상의 온갖 풍상들을 몸으로 겪어내는 아버지의 모습.

 

풍경

 

박수근 세대는 세 차례의 전쟁을 겪은 세대이다. 어려서는 식민치하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궁핍을, 해방 이후에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해야 했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그들의 자식이 베트남 전쟁이란 외국의 전쟁에 파병되는 경험을 했다.

 

초가마을

 

실제로 박수근의 자식이 월남전에 파병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연배 세대가 경험한 세 차례의 전쟁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겪어내야 했을 무수한 상처들 중 가장 두드러진 체험이었을 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박수근은 동생 동근을 병으로 잃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미군의 폭격이 평양에 이르자 1944년엔 자신을 제외한 아내와 어린 남매를 금성의 본가로 내려보낸다.

 

그들 가족이 전쟁으로 인해 맞이하는 첫 번째 이산이었다. 해방된 후인 1948년엔 맏아들인 '성소''뇌염'으로 잃고 만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전쟁이 일어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수근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월남하던 중 다시 가족과 뿔뿔이 헤어지는 이산의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혼란 속에 그의 셋째 아들 '성인'이 죽는다. 박수근의 많은 작품에서 여성은 일하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고 있는데 반해서 남성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고, 웅크린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상처받은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추측된다.

 

강변

 

박수근의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에 대하여

 

화가는 화강암의 질감과 색조를 무척 좋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재현하려고 노력했는데 그의 돌에 대한 관심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탑,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이것을 조형화에 도입코자 애쓰고 있다"고 했다.

 

귀가

 

그리하여 그는 오래된 이끼 낀 듯 한 화강암의 질감을 연상케 하는 마티에르를 창안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상의 평면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하게 된 것이다.(박수근열화당)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화가의 아호는 미석(美石)으로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돌이다. 조선미전 도록에 한 번 실린 적이 있을 뿐 별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돌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 그리는 소녀들

 

 

박수근의 화강암 질감표현 과정

 

이러한 화강석의 질감을 내기 위해 화가는 여러 번의 힘든 과정을 거쳤는데, 윤범모 씨가 이러한 과정을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씨의 증언을 기초로 분석하였다. <박수근의 예술세계와 민족미의 구현>이라는 논문에서 이러한 제작과정을 분석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화

 

첫째, 캔버스의 바닥 면에 기름을 섞지 않고 뻑뻑한 채로 물감을 칠한다.

둘째, 캔버스의 결을 따라 가로 세로를 번갈아 가며 제소를 바르지 않은 마대로된 캔버스에 올의 우둘투둘한 요철에 의해 질감이 나타날 때까지 전체적으로 칠한다. 이 때 어두운 색깔로 10~15회 바탕칠을 반복한다.

셋째, 반복적으로 칠해진 물감은 큰 덩어리를 이루면서 마티에르(질감)을 형성하는데 마른 후에 나이프로 크게 뭉쳐진 부분을 긁어냄으로써 본래의 고유색이 마모된 상태로 남는다.

넷째, 화강암의 깊이 있고 묵직함을 표현하기 위해 암갈색으로 반복적으로 붓질을 하여 바탕 처리를 한다.

다섯째, 그렇게 된 바탕 위에 선으로 소재를 그리고 색을 칠한다.

여섯째, 마티엘 간의 부조화 부분은 자 모양의 붓질을 다시 하면서 마무리한다.

 

들길

 

시장

 

그는 실제로 화강석을 옆에다 두고 그 질감을 관찰해 가며 작품 속에 이를 재현해 보고자 노력했는데 그가 이처럼 화강암에 애정을 가진 것은 한국의 야산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는 돌이며 수많은 조각이나 암각화의 재료로써 민족적 정서를 담고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귀한 대리석도 아닌 화강암이라는 흔한 돌멩이는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소박한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운보 김기창金基昶(1913~2001)화가

김기창은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 당시 총독부 토지관리국 직원이던 아버지 김승환과 어머니 한윤명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덟 살(승동보통학교 2학년)에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상실한 후 언어 장애의 증세가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의 소개로 이당(以堂)김은호 화백에게 동양화를 배워 1931년 조선미술대전에 출품하여 1940년까지 6회 입선, 특선 3회를 기록했다.

 

광복 전의 활동은 주로 일제의 내선일체 사상을 정당화하는 친일 활동으로 점철되었다. 1943년에 아내 우향 박래현과 처음 만나서 3년간의 필담연애 끝에 1946년 결혼하였다.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교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했다.

1960년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타이베이(台北)와 홍콩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출품했고 이어 도쿄(東京마닐라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도 출품했다.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훗날 세종대학교)으로 교직을 옮겼고 문화자유전에 출품했다.

 

1963년에 5월 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고, 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한국 대표로 출품했다. 1964년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渡美), 1969년에 재차 도미하여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홍익대학교와 세종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고, 1984년에는 서울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였다.

 

위의 글만 보면 그는 영락없는 한국화의 대부쯤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의 뛰어난 붓놀림으로 일제 군국주의를 떠받쳐 준 전력을 가진 화가다. 그 그림들이 고스란히 남아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운보는 스승인 이당 김은호와 더불어 사제지간이 모두 친일화가이다. 그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그림을 통해 일제의 전쟁동원에 적극 협력하였다.

 

일제 말 친일 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194244) 자연스레 친일파의 나락에 빠져든 것이다.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한 선전 작업에도 앞장섰다. 이는 우선 신문·잡지류의 대중매체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총후병사1944.4 매일신보에 게재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8.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그림과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는 펜화에 담채를 가한 삽화이다. “완전군장으로 간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있다고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친일파 99에서 밝혔다.

 

그러나 총후병사에 대해서 김기창은 "정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삽화에 불과해 친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고 친일작품행위를 부정했다. 이러한 운보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당시 남양군도에서 대검을 소총에 끼운 채 적진을 향하고 있는 일본군의 육박전을 묘사한 적진육박(1944)이라는 작품이 공개되면서 이 말은 거짓말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적진육박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소위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미술전람회에 출품됐다고 밝혔다.

 

24살 때인 조선미술전람회(줄여서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운보는 연4회 특선 경력으로 27살 나이에 선전추천작가가 되면서 추천 작가된 영광을 일제군국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갚은 사람이다. 조선남화연맹전(1940.10), 애국백인일수전람회(1943.1)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적극 협력 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유려한 붓끝을 놀려 일제군국주의를 찬양, 고무하는 그림을 그려낸 화가이다.

 

작품세계

 

그의 화풍은 자유롭고 활달한 필력으로 힘차고 동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여, 고시적인 풍속화에서부터, 형태의 대담한 왜곡을 거쳐 극단적인 추상에 이르기까지 구상, 추상의 전 영역을 망라하는 폭넓은 작가적 역량을 구사했다.

 

또한 복음서의 예수 전승(傳承)을 한국적으로 해석, 예수를 한복을 입은 한국인으로 묘사한 동양화를 그렸는데 이는 예수를 한국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기독교를 토착화하기 위한 신학적인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는 로마 제국, 헤롯 왕실, 예루살렘 성전의 착취를 받는 가난한 농촌공동체요,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곳',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불릴만큼 무시와 소외를 받는 지역인 갈릴리에서 변변치 않은 직업인 목수로 살아간 민중이었는데, 김기창 화백의 그림에서는 양반의 옷을 입고 있는 모순이 있다.

 

대표작으로 세종대왕 초상, 군마도, 청산도, 소와 여인등이 있다.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평의원으로 있던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그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해 그린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완전군장의 총후병사등은 194386일자 매일신보

실렸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977년 은관문화훈장(2등급)

2001년 금관문화훈장(1등급, 추서)

운보 김기창 화백 작품

 

밤새(부엉이)/ 1972, 종이에 수묵채색

 

전복도(戰服圖)/ 1934, 비단에 채색

아악의 리듬/ 1967, 비단에 수묵채색

 

 

세 악사/ 1970년대, 비단에 수묵채색

 

춘정(春庭)/ 1976, 비단에 채색

 

/ 1977, 비단에 채색

 

바보화조/ 1987, 비단에 채색

 

문자도/ 1984, 적색 종이에 수묵

 

서상도/ 1984, 비단에 수묵채색

 

십장생/ 1984, 비단에 수묵채색

 

귀로/ 1993, 비단에 수묵채색

 

점과 선 시리즈/ 1993, 종이에 수묵채색

 

부엉이/ 1976, 비단에 수묵채색

 

초저녁/ 1974, 종이에 수묵담채

청산도/ 1967, 비단에 수묵채색

 

백운도(白雲圖)/ 1978, 비단에 수묵담채

 

수묵 청산도/ 1976, 비단에 수묵담채, 53 x 61 cm

 

탈춤/ 1961, 종이에 수묵채색, 48.5 x 35 cm

 

바라춤/ 1961, 종이에 수묵채색

청자(靑磁)의 이미지/ 1960~1964, 종이에 채색

 

 

()II, 유자, 학과 매병, 연꽃과 고양이/ 1958~1959, 종이에 수묵담채, (4)

 

군해(群蟹)/ 1966, 종이에 수묵담채,

 

보리타작/ 1956, 종이에 수묵채색,

 

정청(靜廳) / 1934 종이에 채색

 

동자(童子) / 1932 비단에 채색

 

흥락도(興樂圖) / 1957 종이에 수묵채색

 

복덕방 / 1953~1955 종이에 수묵담채

 

 

가을(엽귀) / 1935 비단에 채색

 

군상(群像) / 1959 종이에 수묵담채 (4)

 

 

군작(群雀) / 1959 종이에 수묵채색

 

호박꽃 / 1959 종이에 수묵담채

 

 

 

금붕어 / 1960년대 비단에 수묵채색

 

고양이와 나비 / 1964 종이에 수묵채색

 

청산도 / 1970 비단에 수묵채색

 

청록산수 / 1976 비단에 수묵채색

 

 

청산농경(靑山農景) / 1970년대 비단에 수묵채

동양화로 본 예수님의 일생/김기창 화백님께서 그리신 예수님의 일생 입니다.

 

 

* 수 태 *

 

 

* 예수의 탄생 *

 

 

*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 *

 

 

* 제자들을 만남 *

 

 

* 오천명을 먹임 *

 

 

* 물 위를 걷다 *

 

 

*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

 

 

 

* 예수의 발을 씻음 *

 

 

* 최후의 만찬 *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

 

 

* 재판을 받다 *

 

* 십자가를 지시고 *

 

 

* 십자가에 못 박히심 *

 

 

* 시체를 옮기는 제자들 *

 

 

* 부 활 * 

 

 

  * 승천 *

 

 

 

장욱진張旭鎭(1917~1990)화가

 

 

생애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송용리에서 결성장씨 예와공파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8세 무렵부터 이미 그림에 대한 소질을 보여 1937년에는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1939년에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진학하였다.

 

경성 제2고보(경복고등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사에게 항의하다 퇴학당한데다가 성홍열을 앓고 몇 년 쉰 탓에 대학 진학이 이른 편은 아니었다. 그는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등과 함께 유학 2세대군에 속하며 어느 정도 서구미술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일제하에서는 선전(鮮展) 및 재동경미술협회전(在東京美術協會展白牛會)에 출품했다.

 

1944년부터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을 당해 일하던 중 해방을 맞고 박물관 직원과 미술교사로 일하며 미술활동을 재개한다. 1948년 이후에는 신사실파전(新寫實派展), 2·9전 등에 동인(同人)으로 참가했고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현대작가전, 동남아시아 문화교류전, 미네소타대학 미술학부 교환전에도 출품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와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앙가쥬망전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 선산에 장욱진 탑비가 있다.

 

학력

경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 졸업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수료

경성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도쿄 데이코쿠(동경제국대) 미술학교 졸업

작품 세계

파울 클레나 호안 미로의 영향력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아적이고 토속적인 감성을 추상화시킨 독보적인 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아동화(兒童畵)를 연상케 하는 특이한 기법으로 동심(童心)의 세계를 파헤치고 있는데 검소한 색채와 화면의 평면적인 처리가 두드러지며 그의 모든 작품은 소품(小品)의 테두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한결같이 생활의 주변 즉 마을·가족·가로수·건물·자전거·어부 등 동화의 이미지를 좇아 프리미티브한 생략법을 쓰는 작가이다. 작품으로 이 있다.

 

공기놀이 / 캔버스에 유채, 1938

 

/ 캔버스에 유채, 1949

 

붉은 소 / 캔버스에 유채, 1950

 

자화상 / 종이에 유채, 1951

 

일명보리밭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 그림은 나의 자상自像이다. 1950년대 피난중의 무질서와 혼란은 바로 나 자신의 혼란과 무질서의 생활로 반영되었다.

 

나의 일생에서 붓을 못들은 때가 두 번 있었는데 바로 이때가 그중의 한번이었다. 초조와 불안은 나를 괴롭혔고 자신을 자학으로 몰아가게끔 되었으니 소주병(한되들이)을 들고 용두산을 새벽부터 헤매던 때가 그때이기도 하다.

 

樹下 / 캔버스에 유채, 1954

 

그는 늘 잎이 풍성한 나무를 그렸고, 이는 가난하지만 늘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그의 삶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여름 한낮, 나무 아래에서 속옷만 입고,누워있는 어린 아이의 편안하기만 할 마음 또한 그렇다..

 

자동차가 있는 풍경 / 캔버스에 유채, 1953

 

자전거가 있는 풍경 / 캔버스에 유채, 1955

 

나룻배 / 목판에 유채, 1951

 

마을 / 종이에 유채, 1951

 

/ 캔버스에 유채, 1954

붉은 색이 나는 땅 위에 녹색의 들이 잘 어울리어 활력이 넘쳐나고, 가축과 집 가까이 찾아 드는 까치도 한 식구로 여기고 있다.

 

 

/ 캔버스에 유채, 1955

 

얼굴 / 캔버스에 유채, 1957

아이의 눈, , 귀 목이 가장 단순한 기호로 그려져 있다.그 뒤로는 집 세 채가 바로 또는 거꾸로 서 있다. 천진한 어린이가 두 다리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면 집이 거꾸로 보일 것이다.

 

 

달밤 / 캔버스에 유채, 1957

 

나무와 새 / 캔버스에 유채, 1957

화면에 그린 소재들이 마치 어린이가 그린 것처럼 한결 같이 간결하다. 작가가 늘 말하는 [나는 심플하다]는 말 그대로 소재가 지니고 있는 핵심적인 구성 요소만 그려서 가장 단순한 그림을 창작한다.

 

 

배와 고기 / 캔버스에 유채, 1960

 

까치 / 캔버스에 유채, 1958

 

,,,/ 캔버스에 유채, 1961

 

모기장 / 캔버스에 유채, 1956

입체주의 시점에서 그린 그림이다. , 모기장 안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視占)에서 그리고 등잔, 요강과 그릇은 옆에서 바라다 보는 시점에서 그렸다.

 

 

무제 / 캔버스에 유채, 1962

 

어부 / 캔버스에 유채, 1963

 

/ 캔버스에 유채, 1964

 

산수 / 캔버스에 유채, 1968

 

얼굴 / 캔버스에 유채, 1969

 

풍경 / 캔버스에 유채, 1970

 

가족도 / 캔버스에 유채, 1972

 

나무와 아이 / 캔버스에 유채, 1969

 

어미소 / 캔버스에 유채, 1973

 

고향 생각이 나면

 

그리움

 

가족 / 캔버스에 유채, 1973

 

하얀 집 / 캔버스에 유채, 1969

 

부엌 / 캔버스에 유채, 1973

 

원시시대 그려졌다고 하는 동굴 벽화 같기도 하고, 암호화된 그림 같기도 한 작품이다. 사람도, 벽도, 부엌의 모습도 모두 단순화되었다. 가재도구 하나 제대로 없이, 빈궁하기만 한 살림이지만 그들은 절망하거나 괴로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이라고 할까...

 

툇마루 / 캔버스에 유채, 1974

 

멍석 / 캔버스에 유채, 1973

 

평상 / 캔버스에 유채, 1974

 

초당 / 캔버스에 유채, 1975

 

길에서 / 캔버스에 유채, 1975

 

나무와 까치 / 캔버스에 유화, 1977

 

원두막과 정자 / 캔버스에 유화, 1977

 

가족 / 캔버스에 유화, 1977

 

돼지 / 캔버스에 유화, 1977

 

소와 나무 / 캔버스에 유화, 1978

 

길이 있는 마을 / 캔버스에 유화, 1979

 

가로수 / 캔버스에 유화, 1978

 

가족 / 캔버스에 유화, 1979

 

나무 / 캔버스에 유화, 1986

 

집과 나무 / 캔버스에 유화, 1986

 

나무 / 캔버스에 유화, 1989

 

밤과 노인 /캔버스에 유화, 1990

이 작품은 그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신선의 모습을 한 노인은 바로 작가 자신...이제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그는 세상을 등지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발 아래 있는 세상은 늘상 그의 바람처럼 어린 아이와 새 그리고 나무로 차 있다.

 

천경자千鏡子(1924~ )

 

 

천경자 화가

 

출생

19241111(88), 전남 고흥군 | 쥐띠, 전갈자리

학력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미술학

경력 경력 더보기

 

1981 ~ 평화통일정책 자문위원

1974 ~ 아프리카 풍물 시리이즈 스케치전

1973 ~ 천경자 화랑(현대화랑)

 

수상 수상 더보기

1983 은관문화훈장을수상

1955 대한미협전대통령상

이야기

주요작품

뮤직

인물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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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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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활동|

같은 학교 출신인물|

전남 고흥군출생|

작가소개 클림트(Gustav Klimt)

 

클림트는 19세기 말의 과도기적 화가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분리파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현란한 색채로 관능성과 악마적 요소 그리고 끊임없는 긴장이 뒤섞인 회화로 관객에게 언제나 강한 인상을 준다.

 

 

그의 작품 <요부>의 이미지는 성에 대한 공격적 사디즘(sadism)적 요소와 동물적 모티브에 나타난 힘과 공포 그리고 관음적이고 동성애적인 성적 표현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성적 표현은 단순한 본능적 성에 대한 갈망이나 충족이 아닌 의식과 비판이 담긴 예술작품으로의 승화로 해석될 수 있다.

 

장미와 여인, 1981

하와쓰, 1981

폭풍의 언덕, 1981

하와쓰의 블랙 불 호텔, 1981

폭풍의 언덕, 1981

뉴욕 센트럴 파크, 1981

타에스 푸에블로 촌, 1981

꽃다발을 든 여인 , 1981.꽃을 든 여인 , 36 X 32cm  황금의 비, 1982

 

우리나라 채색화의 대표작가 천경자(1924-) 선생의 '황금의 비'. 1982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황금비가 꽃비처럼 쏟아지는 봄날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우수에 젖은 여인의 눈빛과 긴 목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하염없는 그리움을 자극한다. 가슴깊이 묻어두었던 옛 전설속의 여인처럼 추억을 반추하게 한다.

천경자 선생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숱한 화가들을 배출했고 동시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서있다. 특히 채색화를 왜색풍이라고 무조건 치부했던 60년대까지의 질긴 암흑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채색화의 봄을 맞은 이즈음 그의 작가정신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푸에블로족들의 설날, 1982

모자를 쓴 여인, 43 X 36 cm / 종이에 채색, 1982

두상, 1982

노오란 산책길, 1983, 94 x 74 cm/ 종이에 채색

테네시 윌리엄스의 집, 1983

괌도에서, 1983, 45.5 x 37.9 / 종이에 채색

괌도, 1983

북해도 鈴蘭, 1983

어느 여인의 , 1984, 60 x 44cm / 종이에 채색

켓츠, 1984

어느 여인의 , 1985

아라만다의 그늘, 1985

나비 소녀, 1985, 60 x 44cm / 종이에 채색

막간, 1986, 40 x 31 cm/ 종이에 채색

발리섬의 소녀, 1986 40.9 x 31.8 cm / 종이에 채색

마아가렛 미첼 생가, 1987

태국 무용수, 1987

閏四月, 1987, 25.8 x 17cm / 종이에 채색

재즈, 1987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87

모뉴먼트 밸리, 1987

나바호족의 여인, 1988, 41 x 31.5cm / 종이에 채색

아이누 여인, 1988, 41 x 32cm / 종이에 채색

누가 울어, 1988, 79 x 99cm / 종이에 채색

아파치족의 여인, 1988. 31.5 x 41cm / 종이에 채색

헤밍웨이의 집, 1989

은 내리고, 1989, 41 x 31.5cm / 종이에 채색

자마이카의 고약한 여인, 1989

마이애미로 가는 길, 1989

헤밍웨이의 집 - 키웨스트, 1989

누가 울어, 1989, 79 x 99 cm/ 종이에 채색

캬바레, 1990, 24 x 27.5 cm/ 종이에 채색

그라나다의 흑인 자매, 1993

 

그라나다의 시장 / 1993 / 37.5 x 45cm / 종이에 채색

그라나다의 여도서관장, 1993, 37.5 x 45.2cm / 종이에 채색

소녀와 바나나, 1993, 40.8 x 31.5cm / 종이에 채색

모자 파는 그라나다 여인, 1993, 45.5 x 38 cm/ 종이에 채색

그라나다의 창고지기 하는 女人, 1993, 37.5 x 45.2 cm/ 종이에 채색

불티모어에서 온 여인, 1993, 38 x 46cm / 종이에 채색

불티모어에서 온 여인, 1993, 41 x 32cm / 종이에 채색

黃昏, 1994

處女石佛, 1994, 40 x 30.5 cm/ 종이에 채색

우수의 티나, 1994

러시모어 국립공원, 1995

러시아 서커스단, 1995

황혼의 통곡, 1995, 94.5 x 128.5cm / 종이에 채색

펜실바니아 아미쉬 마을, 1995

내 슬픈 전설

출처;원더풀드림 우리나라 유명화가 5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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