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나라 때 하규(下邽) 사람 적공(翟公)이 정위(廷尉) 벼슬에 있었다. 빈객이 문 앞을 늘 가득 메웠다. 자리에서 밀려나자, 그 많던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겨 대문 앞에 참새 그물을 칠 정도였다. 얼마 후 그가 원직에 복귀했다. 빈객의 발길이 다시 문 앞에 줄을 섰다. 적공은 말없이 대문 앞에 방문을 써 붙였다. "한 번 죽을 뻔하고 한 번 살아나자 사귐의 정을 알겠고, 한 번 가난하다가 한 번 부자가 되매 사귐의 태도를 알겠다. 한 번 귀하게 되고 한 번 천하게 되자, 사귐의 정이 드러났다.(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온다. 찾아온 자들이 뜨끔해서 물러났다.
추사 김정희는 '세한도제발(歲寒圖題跋)'에서 이끗이 다하면 사귐도 멀어지는 염량세태를 통탄하며 적공의 방문(榜文)이 박절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전후할 것 없이 방문객의 목적은 자신들의 이끗에 있었지, 적공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뻔한 이치인데 새삼 방문까지 써 붙여 나무란 것은 피차 민망하지 않으냐는 얘기다.
참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잘 나갈 때는 입속의 혀처럼 비굴하게 굽실대던 자들이 실족하여 미끄러지자 거들떠도 안 본다. 그때 가서 내가 고작 이런 인간이었던가 하고 탄식한들 무슨 소용인가. 적공은 속물들에게 분풀이할 기회라도 가졌지만, 한번 밀려난 권력은 대부분 참새 그물 속에 갇힌 채 끝이 나니 문제다.
가깝게 지내던 집안 서숙(庶叔)이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에게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재상 중에 죽어 서소문으로 나가는 사람은 봤지만 살아 남대문으로 나가는 사람은 여태 못 보았네." 벼슬길에 한번 발을 들이면 죽기 전에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 들기에 한 말이었다. 뒤에 송순이 개성유수를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서숙이 강가로 배웅을 나왔다. 송순이 말했다. "제가 이제 제 발로 남대문을 나갑니다." 그러고는 뚜벅뚜벅 남대문을 나서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허균(許筠)의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나온다. 권력이란 원래 허망한 것이다. 방문을 써 붙이는 분풀이가 소용없다. 늦어 더 큰 욕을 보기 전에 제 발로 툴툴 털고 걸어나가는 게 맞는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