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03,141010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 . . 그때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 . .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살고자 ‘회심’과 ‘변화’를 추구하며 직면하는 준엄한 현실을 보게 하신답니다. . 영적이고 도덕적인 변화는 세상의 힘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인간적 지혜나 피상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하신답니다. . 또한 일시적인 감상적 위안이나 자기도취에 의지하는 것은 절망을 낳는 퇴행의 길이라는 점도 지적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길만이 진정한 회심과 변화로 이끈다는 점을 암시하신답니다. . 이는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큰마음’을 요구한답니다. . . . 깨어진 환상은 우리를 아프게 한답니다. .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어려운 첫걸음을 내딛도록 이끄신답니다. . . . 20세기의 뛰어난 신학자 버나드 로너건 신부의 사상에 대한 한 탁월한 연구서에서 우리는 진정한 회심과 변화를 위한 출발점을 보게 된답니다. .
“도덕적 나약함이라는 이 문제에 대한 잠재적인 해법은, 사람 혹은 공동체가 인간 사랑의 모든 형태를 초월하여 더욱 확장된 종교적 사랑을 추구하는 것에 헌신하도록 할 새로운 유형의 종교적인 진정성에 기반을 둔 종교적 회심이다. 그 같은 종교적 회심은 ‘전적인 타자’(他者)에 대해 사람 혹은 공동체의 편에서 응답할 것을 포함한다”(조지프 플래너건, 『자기 앎의 탐구』에서). . . . 진정한 회심과 변화를 위한 노력은 결코 쉽지 않답니다. .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위대한 길을 매일의 소박한 일상을 통하여 걸어야 한답니다. . 여기에는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그 길의 위대함과 가치를 강조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답니다. . . .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답니다. . 나는? 외통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