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전역을 훑으면 어느 곳에선가 ‘무슨 무슨 쵸프 서’라고 하는 이름의 할아버지 후예들이 튀어나와 반길 것 같은 막연한 기대와 잔잔한 흥분의 물결조차 일어나는, 역시 할아버지의 후예인 내가 갖는 평소의 심경이다.
사랑방 할아버지들의 모습이나 세상을 뜬 이의 영구행렬을 보며 자란 나는 안 계시는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늘 가시지 않았다. 살았던 흔적이나마 찾고 싶은 마음이 지금도 꽉 차 있다. 그런데도 실현할 수 없는 무기력을 한탄한다.
내가 자랄 때에 할머니를 보며 느낀 점, 홀로 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지만 그런 것이 나에겐 별일이 아닌 것처럼, 이웃의 다른 집 할머니들처럼 그렇게 평범한 할머니로만 여기고 싶었다.
굳이 어른들의 일에 참여하려 하지 못했으니 비록 생각에 그치는 일일지라도 지금은 지극히 송구할뿐더러 뒤늦게 뉘우친다.
이 지구상의 모든 현존 인과 이미 세상을 뜬 모든 이를 모아 놓고, 부르고 뒤지고 살펴서 할아버지의 행적을 알고 그 후예들을 찾아내서 우리가 태어난 뜻을 알고 새겨 보고 싶어질 따름이다.
어떤 연유로 고국을 떠나서 유랑 길로 들었으며 백러시아계의 여인과 인연을 맺었는지 난 모른다. 지금은 할머니가 청상과부로서 평생을 수절하시며 살아오신 명백한 사실, 할아버지가 백계 러시아인인 새 할머니를 맞이해서 후손을 두었다 한들 그것은 명백한 사실로만 있을 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 결과인데 무슨 사연이 있었든 무슨 상관이랴 싶다.
그러니 못난 이 후손은 청운의 꿈을 안고 북만주 벌판을 누비고 전전하며 러시아에 뿌리를 내린 할아버지의 후손이 있으므로 해서 더욱 할아버지의 가신 길을 추앙(推仰)할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께서는 무한한 희망이며 대단한 존재임이 틀림없는, 즉 이 세상에 태어난 참뜻을 이룩하신 분으로 자랑하고 싶다.
한 여인의 일생을 담보로 먼 시베리아까지 씨앗을 뿌렸다면 가히 우리 할머니의 희생은 값지다 할 것이다.
할아버지의 행적을 믿고 싶다. 반듯하고 웅대했으리라. 다만 시간이 그 뜻을 펴기에 너무나 짧았을 것이다. 그랬으리라.
경의선 철도가 이어진단다. 그러면 제일 먼저 할머니께 고하고 북만주로 달려가서 할아버지의 체취를 느껴보고 내친김에 시베리아로 들어가서 할아버지가 밟았든 그 길을 가보고 싶다. 그래서 어딘가에 묻혀계실 할아버지의 유해를 찾아뵙고 그 갈래를 찾아 엮어서 한 울을 만들고 싶건만 언제나 되려는지, 다음 세대로 이 엄청난 일을 또 물려주어야 할 것인지 아득하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