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

외통프리즘 2008. 6. 1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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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明滅

1562.010105 명멸明滅

생성과 소멸, 만유의 진리가 여기에 담겨 있다. 한 형체의 생성을 지켜보고 그의 소멸을 바라보는 꼬마의 눈이었다. 그것을 지을 때 아래 위 눈꺼풀이 넓게 벌려져서 오래 머물렀고, 없어질 때 가깝게 마주하고 자주 맞붙어 있었다.

 

한 어린이에 비친 형체의 명멸은 지극히 단순하고 피상적이었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각기의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의 순수성에 비판이 비등하리라. 허나 이것은 철들기 전의 일이니 그대로 만화이고 만평이다. 주저 없이 말하리라.

 

 

교정의 벗 꽃이 지면서 야들야들한 연녹색의 잎을 피우고 있다. 어미를 껴안은 어린애처럼 매달린, 어미 가지에서 떨어질세라 조심스런 기지개로 제 키를 키우는 여린 가지가 싱그럽다.

 

봄볕이 양달쪽으로 병아리 떼를 몰아가는 따스한 날인데도 응달진 곳은 아직 냉기가 남아 옷소매를 여미는 어중간한 날씨다.

 

어디에서 들었다. '매봉산' 기슭에 이상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학교를 마치고 죽이 맞는 또래 동무와 같이 그 곳으로 달려갔다.

 

볼 것에 기걸(饑乞)들린 꼬마들은 단숨에 그 곳에 닿았다. 높은 산이 무너져 내린 듯 가파른 골짝에 넓지 않은 평지가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태고쩍 산사태 흔적이리라. 산후미를 돌아 흐르는 넓은 봇도랑 위에 넓게 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 들어서니 거기엔 어느새, 잘 다듬은 목재를 켜켜이 쌓아 놓고 있었다.

 

목재는 대체로 원만하고 곱게 다듬어져서 흠 하나 없다. 기계로 뺀 듯이 빈틈없이 빠졌다. 나뭇결은 하나같이 곧게 아래위로 뻗었고 가장자리를 적당히 자르도록 하여 그 곳 마무리는 되지 않았다.

 

자그마한 키에 검은 옷을 입고 잇빨이 보드라운 톱을 들고 움직이는 이 사람은 특유의 모양새로 보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짧은 머리에 흰 수건을 머리에 동였는데, 왼쪽 이마 위에서 매듭이 지어서 남다르게 보였다. 새까만 눈썹에다 짧고 소복한 코밑의 수염이 일본사람임을 알게 했다. 넓은 바지의 오금아래는 장딴지 위와 발목에 띠를 매어 간추리고, 엄지발가락 사이로 굵은 코 끈이 달린 헝겊신을 신고 신중히 움직인다.

 

조용하고 조심스럽다.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모래 흠 하나라도 내서는 안 되고 티끌하나 묻어서도 안 될, 마치 신주를 모시는 행동이다.

 

나무향내가 물씬 풍긴다. 싱그러운 풀 냄새와 어울려서 신선이 되는 길목에 드는 느낌이다.

 

며칠 후 다시 가봤을 때 집은 거의 마무리 되었다. 두렵게 보이던 열녀문이나 효자문과 견주어서, 그 크기는 비슷한데 예전에 내가 본 적이 없던, 그런 이상한 집이 만들어졌다. 이음새는 빈틈없이 물려서 마치 통째로 부어 놓은 집처럼 정교했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꼬마에게는 귀신을 모시는 집을 짓는 이 사람이야말로 귀신같이 보였다. 그래서 두려워하며 먼발치에서 그 집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두려움에 숨죽이고 있었다.

 

몇 날이 또 지났다. 어느새 봇도랑의 긴 둑을 넓히고 그 위에 하얀 모래를 깔아 '신사참배'의 길을 만들고, 우리는 이 길을 따라서 그 집으로 참배를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하는 참배였다. 비로써 꼬마는 이 건물이 '진자(신사神社)'임을 확인했고 열녀문과 효자문을 겹쳐가며 생각했다.

 

효자문과 열녀문은 큰길가에 있게 마련인데 이 '신사'는 사람의 발길을 피해서 산골짜기에 숨는 이유는 무엇일까.

 

열녀문과 효자문은 그를 기리고 널리 알려서 행적을 본받게 하려는 홍보의 목적이 있고 신사는 신비적 실체로 거듭나려고 외지고 한적한 곳을, 신의 영험을 최대로 끌어드려서 누구나 경외의 대상이 되도록 고려한 듯하다.

 

물리적 실체는 두 유형이 비슷하나 정신적 실체는 판이한, 이 두 가지 작은집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던 꼬마는 어느 곳이든 혼자서는 갈 수 없이 두렵기만 한 존재였다. 꼭 둘 이상이라야 효자문도 가보고 열녀문도 가보고 신사도 가보는 것이다.

 

신사는 산 속에 숨어있고 효자 열녀문은 길가에 드러내는, 상반된 위치와 목적 취지를 나름의 판단으로 가늠하는 꼬마는 마치 한 마을에서 토박이 문중 대가(大家)는 산을 울 하여 아래를 내려 보는데 흘러들은 뜨내기 씨는 동구 밖 개울가나 한길 가의 주막에 자리하는 일상과 비교하며 묘한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섭섭해 한다.

 

꼬마가 조석으로 오르내리는 앞산인 매봉산을 신사가 있는 동쪽 어느 줄기를 타고 올라도 신사의 ‘가미사마(神樣)’가 뒷다리를 잡아당길 것 같고, 옆으로 돌아 신사의 지붕을 내리 보는 꼭지에 오르면 이다음 참배 때가 다가오기 전에 일신에 변고가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참배를 하지 않고 산자락을 밟으면 화가 미칠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꼬마는 산을 무섭게 여기게 되었으며 꼬마에게는 앞산, 매봉산이 신사의 산이 되었다.

 

신사는 매봉산 속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어서 산과 일체가 돼버리고 꼬마네 동네 사람은 앞산인 내 마당 내 정원을 잃게 되었다.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열녀 효자문은 여전히 길가에서 조석으로 우리의 발소리와 일상사의 얘기를 빠짐없이 듣고 우리의 가슴에 효심과 정절의 결의를 심곤 했다.

 

해방을 맞았다.

 

일단의 청년들이 신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청년들의 어깨엔 곡괭이와 삽 망치나 쇠스랑이 들렸고 이들은 삼삼오오 뭉쳐서 웅성웅성 뛰어가고 있었다.

 

이미 면장 집을 불 지르고 가는 참이다. 다른 집에서는 다 훑어간 놋그릇이 나오고 더하여 필필이 나오는 명주와 비단과 무명을 마당에 끌어내어 불을 지른 뒤에 달려 나가는 것이다.

 

해는 지고 어둠이 깔려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밤을 택한 것이 인간의 심성을 잘 들어내는, 천지의 일대 요동이다.

 

신사 앞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달려들어서 찍고 부수고 파고서는 불을 질렀다. 불길은 매봉산을 밝혀서 팔월의 여름밤 마을을 거울같이 비추었다.

 

한낮의 열기를 고스란히 지붕 위에 받아가며 타고 올라앉았다가 기둥을 훑어내려 주추 돌을 뚫고 땅위에 스미는 ‘스기(杉木)’의 열 전도가 넘친 것인가, 아니면 태양의 노여움이 한낮의 열기를 신사에 모았다가 해거름에 응어리를 불사르는 것인가. 불똥이 매봉산 봉우리까지 치솟았다가 서풍을 타고서 불 밝힌 동네의 집집이 내리 앉는다. 신사는 불쏘시개처럼, 소지(燒紙)장처럼 활활 잘도 타 올라갔다. 매봉산은 신사의 생성을 지켜보고 그 곳에 찾아온 면면을 보았으되 바다를 향해서 외면했고 신사의 소멸을 뚫어보고 함성을 들었으되 들판을 향하여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매봉산은 꼬마를 싸안으며 꼬마는 매봉산에 올라서 멀리 다리건너 효자문과 열녀문께 눈길을 건넨다. 발아래 신사의 주춧돌을 밟고 외친다. ‘해방이다‘.

 

그러나 허구한 세월 많은 외침(外侵)으로 우리의 유산이, 외침의 그 흔적이, 눈앞에서 사라졌으되 역사적 사실을 지울 수는 없다. 매봉산이 알고 있듯이 백두산이 눈뜨고 지켜봤을 것이고 한라산이 귀 열고 들었을 것이다. 우리 겨레의 수난을. /외통-

자기의 조국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없다.(G.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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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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