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소리

외통넋두리 2008. 6. 1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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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소리

1590.001121 남포소리

 

태고의 냄새를 품은 바닷바람이 상큼한  해당화 향기를 실어서 우리의 코 속에 바르면서 가슴에 칠하는 바닷가다.

 

우리 밭의 감자포기가 하얀 꽃을 피워서 노랑나비 흰나비를 모으고, 한창 퍼진 순은 초록빛을 넘겨 검게 칠하여 밑뿌리 열매를 꿈꾸는, 사월의 긴 여름 아침나절이었다.

 

멀리 '태백'의 준령이 나직이 손등처럼 깔려서 해무리를 뚫고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하늘과 땅을 가르는 선을 선명하게 그어준다.

 

모래언덕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바다, 즐거운 코를 시샘하듯 파도는 그 중후한 소리를 흙에 버무려서 귀를 울린다.

 

내가 서 있는 이곳, 우리 밭의 들입이며 밭머리이고 할머니의 쉼터이고 우리들의 놀이터이다.

 

이랑을 따라 간간이 심은 장다리무가 성큼 자라서 노란 꽃을 피워가며 어느새 가을 씨를 만들려고 하늘을 보고 맹세하는 듯 하늘거린다. 날아온 노랑나비의 발끝이 꽃잎 위를 더듬을 때, 내 발은 벌써 할머니 곁에 와 있었다.

 

날아가는 나비아래서 감자 포기를 비스듬히 제치고 북을 돋우시는 할머니이시다. 예민한 손끝의 감촉으로 뿌리 밑을 더듬어 주먹만 한 감자를 가려내시는 일, 포기는 살리고 굵은 감자는 감쪽같이 따내는, 할머니의 감자포기 외과 수술에 의해서 우리 식구의 오늘 양식이 마련된다.



감자 포기를 살아있는 생명을 다루듯이 온 신경을 쏟으시니 내가 옆에 다가간들 알아차릴 수도 없겠지만, 그보다는 할머니의 일상을 초월한 경지에 이른 생활 때문일 것이다.

 

모래언덕 너머에서 울려오는 바다의 소리가 공중에 흩어지듯이, 사방으로 트인 허공에 바람도 스치고 나비도 스치고 나도 스치는, 하늘이 비어있고 들판이 비어있다.

 

가슴이 구멍 나서 마음속이 비었는지, 할머니의 마음과 눈과 귀와 다른 모든 오관이 메이고 터지고 찢기어서 무엇인들 제대로 담을 수 있었겠는가.

 

살며시 다가가서 팔을 잡아당길 때 비로써 할머니는 옆 돌아 나를 보시고 ‘남포소리 울렸니’를 물으신다.

 

'남포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내가 '남포소리'가 난들 알 수도 없거니와 그 소리가 언제 나는지를 모르니 말이다.

 

허리를 펴시고 한 손을 이마에 얹어서 중천의 해를 바라보시고는 밭머리로 나를 이끄신다. 해가 그 넓은 하늘 위에 어디쯤 있어야 때가 되는지를 가늠할 수 없는 일, 때 맞혀 멀리 소리 없이 지나가는 기차를 지켜보지 않는 이상, 도무지 나무그늘 하나 없는 빈 들판에서 때를 가리는 일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할머니가 밭머리에 다다르기 전에 멀리 남쪽 회색하늘 밑에 기어가는 듯 엎드린 듯한, 금강산의 북쪽 끝자락 ‘백정봉(百鼎峯)’ 언저리를 가리키며 ‘저어기 저산에 중석광산이 있는데 거기서 남포소리가 나면 점심때가 된단다.’ 잠시 후 엷은 구름 색을 닮은 회색의 소리, 바다와 들과 산을 울리는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포소리'였다.

 

아직 어릴 때의 나는 이 드넓은 벌판에서 일하는 모든 이에게 점심때를 알려주는 저 천둥소리, 하늘 끝까지 퍼질듯 한 소리, 나직하여 땅을 울리는 저 소리를 들려주는 곳이 어디인지 기이했다. 왜 점심때를 알려주는 지도 몰랐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오면서 빈 들판에 높이 솟아 가물거리는 종달새의 반짝이는 날개를 쳐다보며 몇 번이고 감자포기에 걸렸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는, 개 속이는 ‘노고지리’를 기어이 못 잡았듯이, 끊일 듯 이어질듯 그리워지기만 하는 내 지난날을 붙잡아매어 한바탕 필름처럼 되풀어보고 싶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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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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