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로운 백사장이 끝없이 이어진 바닷가에 와있다.
‘희역섬(백섬白島)’을 눈앞에 두고 남으로는 ‘말구리’, 북으로는 ‘금란리’, 양 끝을 이은 하얀 모래밭이 양산 끝자락처럼 완만히 휘어져서 실오라기 같은 파도를 담아낸다.
수평선을 늘릴 수 없어서 모래밭을 일구는 바다와, 산을 헐어서 바위를 만들고 바위를 쪼개어 흙을 만들고 마침내 흙을 씻어 만든, 대지의 끝 모래와 구름이 머물 자리, 하늘이 있을 뿐이다.
수평의 양방(兩方)이 햇빛에 녹아서 푸른지, 지평의 삼 방(삼(三方)이 달빛에 스며서 파란지, 하늘의 천방(千方)이 별빛을 삼켜서 해맑은지, 내 고향 바닷가 여기 내가선 자리에선 삼색이 어울려서 한눈에 출렁인다.
우주의 중심이다.
공허한 곳에 오직 하나. 내게 위안이 되고 볼거리가 되고 말하고픈 섬, ‘희역섬’이 손을 뻗쳐서 닿을 듯이 눈앞에 더 있을 뿐이다. 바위틈에 풀뿌리가 내린 듯 바위가 푸르고 싱그러워 보인다. 소나무와 풀잎으로 옷을 입은 ‘희역섬’이 금방 바지를 걷고 걸어오다 파도에 쓸려서 밀려가고 파도에 밀려서 다시 온다. ‘희역섬’은 마을을 지키고 싶다.
어릴 때 바닷가 놀이에서 ‘희역섬’은 유일한 내 좌표다. 조개를 캐 먹으며, 감자를 삼굿구이 해 먹고 해 저무는 석양까지 끝없는 모래밭을 헤매다 보면 옷 벗어놓은 곳을 있게 마련인데, 똑같은 모래밭과 똑같은 파도와 똑같은 하늘이 있을 뿐이다.
이때 ‘희역섬’만 보고 가서, 보이든 자리 그 바위가 보이도록 모래밭을 따라 가면 되니 거리도 방향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 같은 천방지축은 ‘희역섬’이 없었으면 번번이 발가벗고 집에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번번이 ‘희역섬’이 있어 내게 소리쳐 알리고 있다.
‘희역섬’은 우리 마을 청년들의 수영 실력 점검 때 반환점이 되어서 많은 이가 이용한다. 하나 있는 불문율은 섭조개를 따서 입에 물고 오는 것이다. 눈속임으로 가짜 실력을 과시하기 때문이다. 섭조개를 물고 파도를 타고 오는 이는 이 고장을 지킬 투사들임이 틀림없어서, 우리 어린이의 선망이었다. 이렇게 ‘희역섬’은 젊은이에게 희망을 안겼다.
이제, 여러 곳의 해안에서 섬을 보았으되 아름답기는 하나 남의 섬 같아 못 갈 곳 같고, 헤엄쳐 갈 곳이 아닌 곳 같아서 더더욱 ‘희역섬’이 눈에 선하다.
‘희역섬’은 내 고향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