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이 선생

외통넋두리 2008. 6. 22.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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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이 선생

1606.001126 / 외통



일본인 여선생이 우리 반, 삼 학년을 담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대동아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를 맞추어 선생님은 전근하고 우리는 남자 선생님의 억센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다른 선생님의 기억은 나질 않는데 유독 ‘후지이’ 선생님의 넉넉한 풍모와 자상한 가르침이 잊히지 않는다.

선생님은 조회 시간에 반드시 우리 반 학생의 복장을 훑어보시는 자상한 선생인데, 가령 단추를 안 뀌었다든지 손톱이 길다든지 할 때 선생이 무릎을 굽혀 어린이와 키를 맞추어가면서, 눈동자를 마주치며 얘기하기 때문에 우리 반 학생은 누구나 이 선생님을 따랐다.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누나처럼 대해주었는데 어느 날 전근하신단다. 어떻게 됐는지는 그 영문은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때 울었는지 웃었는지도 기억은 없지만 내게 남은 몇 가지 이 선생님의 그림만은 지워지지 않는다.

넉넉지 못한 때여서 우리들의 발바닥은 ‘게다’짝이거나 고무신으로 가린 애가 태반인데 간혹 운 좋게도 학교로 배급하는 운동화를 제비 뽑아 산 애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운동화는 신는 신이 아니라 모시는 신이 되다시피 되어서 애지중지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럴 것이, 다음 차례가 되려면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아예 영영 못 얻어 신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직 운동화를 타지 못한 애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으며 운동화 신은 애들을 선망한다.

우리 선생님의 운동화 신은 발의 뒷모습이 너무 예쁘다. 우리로선 엄두도 못 낼, 멋 중의 멋이 들어 있어서 나를 황홀하게 했다. 풍만한 체구지만 어울리는 조그마한 발을 네모 자비 하얀 등 고무가 달린 운동화에 살짝 집어넣고 뒤축은 꺾어서 편안하게 내리눌러 신은 품새가 그렇게 안정되고 멋 저 보일 수 없었다. 교무실에 들어가는 뒤 모습 중에도 선생님의 발꿈치는 단정히 신은 검은 운동화와 조화돼서 비할 바 없이 아름답다. 선생님의 신과 발을 함께 가슴에 안아보고 싶은, 노리개 같은 신을 신은 발이었다. 영영 눈에 선하다.

우리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시절 그들만의 향유지만 어린 내게 아름다움과 멋을 알게 한 교훈적 자태였다.

그러면서도 신 본연의 기능을 저해하는, 꺾어 신는 데 대한 생각은 끊임없이 선생과 다르게 새겨서, 나는 오늘날까지 바르게 신고서 지낸다. 해질 때까지 한 번도 운동화 신 뒤꿈치를 꺾어 신어본 적이 없다. 아무리 헐었어도 반듯하게 신는 내신 신는 버릇은 아마도 이 ‘후지이’ 선생님으로부터 비롯했는지 모르겠다. 아름다움과 멋, 절제와 품위를 동시에 묵시적으로 가르친 선생님은 지금도 생생하게 멋지다.

선생님은 온화하시다. 습자 시간에 미농지 위에 길 영(永)자를 쓰게 했을 때였다. 내 곁에 언제 오셨는지는 모르지만, 곁에 계셨든 가보다. 나는 마지막 획이 미농지 끝을 넘어서 나무 책상 뚜껑까지 이르게 됐을 때 아랑곳하지 않고 그 마지막 획을 책상 뚜껑 위에 내 그었다. ‘책상 뚜껑과 함께 내’라는 말씀으로 옆에 계심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그 획은 그어진 후였다. 싱긋이 웃으셨든 선생님의 뜻을 아직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 부끄러운 것은 그 습자를 미농지 위에 요령 없이 너무 크게 썼거나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치게 썼거나 두 가지인데, 아무려나 다 내 종합판단 능력의 미숙함으로 보아야 옳을 것 같아서 지금도 낯 뜨겁다.

선생님이야 어떻게 하시든 배우는 어린이는 뒤늦게라도 알아듣고 분석하고 판단하게 마련인가 보다. 이점은 어른들의 각별한 유의점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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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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