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피자

외통궤적 2008. 8. 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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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7.011126 기피자
오지의 마을에 홀로 유배된 듯 동료들 간의 대화도 끊기고 연락할 수 있는 길도 없으니 누가 어디에 가 있고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지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오늘은 ‘석곡리’ 구장 집 모 내는 날이다. 내가 돕기로 이미 내락(內諾)이 되어있기 때문에 지서에 가지 않고 논배미에 들어서서 모를 심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일부러 올라온 다른 동네 구장이 나를 지서로 나와 줄 것을 전하고 제 동네로 올라가 버렸다.
 
모 내기는 품을 앗을 사람이 없어서, 애 어른 할 것 없이 식구끼리 매달려서 심는다.

이것이 딱해서 자청했건만  그대로 발을 씻고 마니 몹시 민망하다. 구장도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에 서로 어색한 인사로 가름할 뿐이다.



새참을 앞둔 시간인걸로 보아 아마 열시쯤 되었는지 모르겠다. 지서로 달려갔다. 지서엔 이미 다른 마을에 가 있던 동료 두 명이 와 있고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가자마자 다섯 발을 장전하여 한발씩 쏘는 단발장총인 일본식 총을 한 자루씩 내 주며 ‘기피자가 출몰’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며 김 순경이 앞장섰다. 우리 셋은 따랐다.




김 순경은 부잣집 맛 아들이 징집을 피해서 순경으로 들어온 것 같은 선입감을 준다. 귀공자다운 풍모에 우리의 형벌될만한 나이인데 아주 지성적으로 생겼다. 그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서 급속히 친해가고 있다.
 
어쩌면 동병상련의 처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의 영향으로 학생신분에서 바로 순경의 신분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택한 간접징집기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분이 경찰관이니 민간인의 호랑이임이 틀림없다.
 
이 곳 지서근처엔 젊은이라고는 눈을 닦고 보아도 없다. 단지 민간의 신분을 취득한 우리의 젊은 혈기가 이곳 주민들의 심사를 어지럽게 하고 이제까지 적막감마저 들게 하던 마을에 우리가 들어와서 판을 치는 것, 이것이 오늘 휴전을 앞둔 한 농촌의 실상이다.
 
얼마만이라도 참고 숨어 있으면 휴전이 될 것이고 그때에 군에 나가면 목숨부지라도 될 것이 아닌가싶어서 모두들 숨어있을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기피자를 잡는 한 몫을 한다며 날뛰니 숨어서 보는 이곳 사람들의 눈이 곱진 않으리라!  허지만 우리는 이미 내친걸음이다. 우리는 여기에 사는 사람들과 다른 처지의 특수계층으로 토박이들의 혹으로 커가는 것이다.
 


해를 머리에 이고 걷기 시작했다. 자갈이 박히지 않은 넓은 길인 것으로 보아 차량의 왕래는 없는 듯하다. 우마차도 드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사람의 왕래는 매우 빈번한 길이 아닌가 싶은 것은 내 경험으로 짐작할만하다.




오리쯤 떨어져있는 낙동강 지류의 호미나루터로 내려가는 길은 깊은 골이 패인 개울을 끼고 있다. 풀과 잘 이겨진 진흙으로 양 가장을 둘러친 둑 사이로  소리 없이 흐르는 물길을 따라서 이 길은 이어져있다.
 
강가의 땅은 비옥하여 찰흙같이 보드랍고 윤기가 흐른다. 천혜의 농토를 이어받은 이곳 주민들의 삶이 전쟁 없는 지난날엔 늘 풍요로웠을 것 같다. 물길을 이룬 낮은 둑 위로 갈풀이 키를 넘게 우거져서 시야를 가리지만 이 갈풀이 앞으로 뻗친 구비와 흐름이 우리가 갈 길을 가늠하게 한다.
 
우리 고향에선 느낄 수 없는, 낙동강 가의 광활한 들 풍경이 내 시야를 꽉 채운다. 실구름은 강바람을 타고 멀리 흘러간다. 조용한 오전 한낮, 낙동강의 작은 지류는 아직 전쟁을 모른 듯이 양안의 마을을 뒤로하며 흘러가고, 강가의 주막은 바쁜 한 때를 잊고 나직이 앉아서 얼른거리는 버드나무 잎 그림자를 내려 보며 졸듯이 숙여있다. 반들거리는 잎 새를 한껏 피워 달고 강 건너 마을에서 오는 사람마다의 사연을 알알이 새겼을 저 버드나무의 침묵은 훗날 나의 산 증인이 될 때가 있으리라!
 
주막집 마루에 총을 들고 걸터앉은 내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아직 버드나무는 말하지 않는다. 잠시 앉았든 김 순경과 동료 둘은 건너오는 배를 검문하려 강가의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신발 끈을 다시 매고 있다가 별안간 총소리가나서 나도 놀라고, 강가로 내려갔던 셋은 사경이 되어 달려올라 왔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총을 잊고 그대로 엎드려서 신 끈을 고쳐 매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방아쇠가 건들어졌나 보다.




나는 이미 죽었을 몸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리를 살피는 의식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내 삶이 우연한 것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한다. 조금 전까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고 어떻게 되었는지도 가늠이 안 되었다. 단지 내 왼쪽다리 위의 바지천이 작게 찢어진 것으로 내 총에서 총알이 나간, 오발이었다고 미루어 생각한다.
 
잠시 후 총알을 꺼내보니 네 발밖에 없고 탄피는 내 주위에 분명히 한 개 있는 것으로 보아 내 실수가 확실해 진다. 피할 방도가 없고 명백한 사실이니 실수로 자인하는 내 몰골이 말이 아니다. 이것이 생명과의 맞바꿈이라고 생각해도 되련만 그런 도량조차 없다.
 
나는 이렇게 생명을 보존하고 있다. 신의 가호가 아니고서야 수그린 내 얼굴과 머리를 피할 수 있었을까싶다. 맞았더라면. 피가 역류하여 어찔해진다. 내 총소리는 강 건너 마을과 이웃마을을 흔들었고 기피자의 잠복체포는 수포로 돌아갔다.
 
고의이건 아니건 결과는 기피자에게 경고가 되어 멀리 피하게 해서 기피방조가 되었고, 그 부모에게는 아들을 살려준 고마운 은인으로 둔갑되고, 김 순경에게는 직무수행 능력 평가절하로 이어지고, 동료들에게는 위험한 추격전의 살상을 면하게 했으니 그들에겐 심리적 짐을 덜었고, 나는 용의주도한 꾀보로 치부되었거나 아니면 어설픈 반 걸치기가 되어 뒷손가락질 당했을 것이다.


포로의 입장에서 어느덧 기피자를 잡으러 다니는 유전(流轉)의 생을 사는 짧은 생에 오늘도 비바람과 번개가 친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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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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