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난 딸 수홍이의 어휘가 요즘 부쩍 늘어서 방송 일에 지친 나의 스트레스를 날려주곤 한다. 얼마 전 일이다. 수홍이가 동생 지홍이와 함께 와서 말을 태워달라고 하기에 엎드려서 두 아이를 등에 태우고 툭툭 반동을 줬더니 두 아이가 굉장히 좋아했다. 그걸 한참 하다 보니까 허리 쪽이 얼얼하게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렸더니, 한참 신이 났던 수홍이가 다시 일어나라고 했다. 그래서, 아빠 힘들어서 인제 그 정도만 할 거야 고 했더니, 수홍이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면서 바로 일어나서 뒤뚱뒤뚱 걷는 두 살배기 동생 지홍이의 손을 끌고 거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수홍이가 동생에게 당부하듯이 소곤거리는 말이 내 귀에 꽂혔다.
“지홍아, 우리 삐지자”.
수홍이의 주장은, 우리의 감수성을 그렇게도 몰라주느냐, 우리 이래 봬도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이다. 아빠같이 무딘 사람과는 같이 못 놀겠다, 느끼는 게 많은 우리는 잠시 화를 내고 있겠다, 그동안 아빠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많은 반성을 하고, 무딘 감수성을 날카롭게 하길 바란다, 뭐, 이런 웅변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수홍이가 매일 새로 배운 어휘를 이용해서 아빠의 많은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방송이 주는 중압감은 스트레스라는 독으로 변해서 우리 방송인들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 특히 고된 일로 잠이 모자라면 그 스트레스가 짜증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즐거워야 할 사무실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일도 다반사다.
수홍이는 항상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자고 오는 버릇이 있는데 지난겨울에는 어린이집이 춥다면서 집에 와서 자겠다고 해서, 매일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할아버지가 수홍이를 집으로 데려오셨다. 가끔 그 시간에 집에서 수홍이를 볼 때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시간만 되면 동생과 싸우고 소리를 지르며 짜증을 냈다. 잠잘 시간에 잠을 자지 못해 짜증을 내는 것 같아서 한번은 가만히 타일렀다.
“수홍아, 잠을 자지 않으면 짜증이 나는 거야”.
교육 효과는 반복을 통해서 나타나게 마련. 짜증 낼 때마다 반복해서 똑같은 말로 그렇게 타일렀더니 내 말뜻을 점차 이해하고 알아들었다. 그 이후론 짜증이 난다 싶으면 얼른 잠자리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새벽부터 유난히 바빴던 어느 날, 저녁에 뉴스를 끝내고 축 처진 몸을 이끌고 집에 갔는데, 수홍이가 오랜만에 컴퓨터를 하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트북을 다 켜고, 교육용 CD를 찾았는데 그 전날 분명히 끼워놓았던 CD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사용한 물건들을 잘 치우지 않는 점이 마음에 걸려서 한번 교육을 해줘야겠다고 작정한 적이 있던 터라 나는 딸 애를 다그쳤다.
“수홍아, 거기 있던 CD 어쨌어.”.
수홍이는 직감적으로 자기가 꾸중을 들을 상황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는지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디 있느냐고 다그쳐도
“나는 모올라”
만 반복했다. 수홍이는 어깨 너머로 힐끗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제 그 재미있던 CD는 찾기 틀렸구나, 하고 판단을 한 모양이었다. 얼른 다른 프로그램을 클릭해서 마우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방 구석구석을 뱅뱅 돌며 CD를 찾으면서 신경질이 밴 목소리로 또 다그쳤다.
“수홍아, 아빠 하는 얘기 안 들려? 어제 아빠가 끼워뒀던 CD 어쨌어?”
“나는 모올라”
“빨리 찾아봐”
“…”
이제 나는 진짜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한 장에 몇만 원씩 하는 CD도 CD지만 새벽부터 일어나서 취재하느라고 잠이 모자라서 가뜩이나 피곤한 아빠가 열을 받고 씩씩거리는데, 그런 모습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한가하게 컴퓨터 자판이나 두드리는 여섯 살짜리 딸 아이가 순간적으로 미워지기 시작했다.
“수홍아. 아빠 말 안 들려?”
하고 큰소리를 쳤더니 수홍이는 여전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조용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마치 타이르듯이 나한테 뼈아픈 한마디를 던졌다.
“아빠, 잠을 안 자면 짜증이 나는 거야”.
나는 얼른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배꼽을 잡고 웃고 말았다.
/ 민경욱-경향신문, 향기가 있는 아침 -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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