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서울 변두리 대형 할인매장에서 일하는 임시직 근로자다. 동그란 얼굴에 선한 눈매를 지닌 스물 아홉 살의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사람 좋기로 이름나고 일손 빠르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그에겐 한 가지 단점이 있다. 일이 끝나면 언제나 뒤도 안 돌아보고 ‘칼퇴근’을 한다는 것이다. 회식이나 야유회는 꿈도 못 꾼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집에다 꿀 발라 놓았느냐고 놀리기도 하고,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 신혼이냐고 묻기도 한다. 지난 11월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아직은 신혼이다. 하지만 벌써 17개월 된 딸까지 있으니 신혼이라기엔 좀 쑥스러운 입장이다. 식만 5년쯤 늦게 치른 것뿐이다. 동갑내기인 아내는 살림이 손에 붙을 만도 한데, 아직도 남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아내는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다. 어려서부터 두 발 대신 휠체어 두 바퀴를 움직여야 했고, 두 팔 대신 입으로 많은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가 칼퇴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내를 대신해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놀이방에 갔다 온 딸아이를 씻기고, 우유 먹이고, 청소하고, 밥 짓고, 찌개를 끓인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입가엔 벙긋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여행을 좋아해 평생 독신으로 날아다니겠다던 그가 스스로 날개를 접은 것은 첫 만남 때문이었다. 장애인 모임에 자원봉사를 하러 갔다가 유난히 활발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아내를 첫눈에 발견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이 예쁜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내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했고, 휠체어를 밀고 다니며 그는 아내에게 푹 빠지고야 말았다.
하루도 떨어지기 싫었던 두 사람은 양가 부모님 허락하에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애는 달콤한 환상, 결혼은 씁쓸한 현실이라던가. 장모님 병환은 깊어졌고 첫 아이마저 뇌성마비로 태어났다. 뇌성마비 아내와 아들, 그리고 심각한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장모님까지, 세 사람 뒷바라지에 두 집 살림 돌보기를 몇 년. 장모님은 결국 세상을 떠나셨고, 아들마저 그들 곁을 떠났다. 하지만 슬픔에 빠져있을 겨를이 없었다. 자기 탓이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아내와 홀로 남은 장인어른을 위로하고 추슬러야 했다. 젖먹이 둘째 애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 한 여자의 남편, 한 집안의 사위이자 한 집안의 장남 노릇, 거기에 주부 노릇까지 그는 기꺼이 짊어지고 일어선 것이다.
취미가 살림, 특기가 뜨개질인 남자. 그런 남편에게 밥 한 끼 지어 먹이고 우는 아이에게 우유 한 번 먹여 보는 게 소원인 그의 아내. 그러나 눈물로 절망하지 않는, 취미가 유머, 특기가 분위기 띄우기인 여자.
이들의 이야기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인간극장’을 통해 방송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높은 시청률을 올리는 것은 물론, 프로그램 게시판의 조회 수도 엄청났다. 엄마랑 다투었는데 이들의 ‘사랑’을 보고 나서 화해했다는 중학생, 사귀던 남자가 변변치 못한 것 같아 헤어지려 했던 걸 반성했다는 아가씨, 열심히 살아가라고 격려해온 택시 기사 아저씨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슴이 따뜻해졌다는 경험을 고백해왔다. TV에서, 영화에서, 소설에서, 그리고 바로 곁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랑을 보고 듣고 직접 겪는다. 그러나 그 가운데 온전한 제 형태를 갖춘 사랑이 얼마나 되었던가. 때로는 왜곡된 욕망으로, 때로는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사랑이 변질하지는 않았던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만큼 했는데 당연히 저 사람은 저만큼은 해주겠지, 나만 한 사람 만난 걸 고마운 줄 알기나 할까 하며 사랑을 오만으로 키우지는 않았던가.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사랑하니까’ 말고 어떤 이유가 더 필요한가. 사랑에는 기준도 없다. 내 눈과 마음이라는 기준 말고 또 누구의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는가. 이유도 없고 기준도 없는 그 쉬운 사랑을 우리는 왜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자체로 순정하고 즐겁고 조금쯤 간지럽기도 한 그들의 ‘사랑’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
/ 이금희- 경향신문 - 향기가 있는 아침 -시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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