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말 만큼 가슴 설레게 하는 말도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황홀할 정도로 신비롭고 감격스러운 이 말을 별로 실감하지 못하고 산다.
죽음이란 별개의 것으로 항상 나와는 아주 먼 곳에 있다고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과 사의 고비를 한 번쯤 넘어본 사람이라면 세상의 어떤 말보다도 이보다 더 절실하고 아름다운 말을 찾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살아있다는 기쁨,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 살아있음의 감격은 분명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최고의 값진 선물이요, 축복이다.
뒷산에 올랐다.
겨우내 죽은 듯 잠들어있던 땅속에서 파릇파릇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들은 이내 쑥쑥 자라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리라. 한갓 작은 풀꽃으로부터도 계절을 느끼고 창조의 비밀을 가늠케 된다.
한 톨의 모래, 한 줌의 흙, 한 방울의 물, 한 알의 풀씨에서도 우주를 본다고 하지 않던가. 생명이야말로 조물주를 바라보는 창이요, 그를 느끼게 하는 열쇠일 것 같다.
목련과 벚꽃과 진달래가 뜨락에서 한데 어울려 장관이다.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련만 제때 맞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고 있다. 긴 잠을 자는 줄로 알았던 겨울 때에도 내내 쉬지 않고 내밀하게 봄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봄은 위로만 오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땅속으로부터도 올라오고 있었다.
다시금 새 생명의 싹을 틔워내는 일이니 어찌 쉬울 수 있었으랴. 가지가 얼면 몸으로, 몸이 얼면 뿌리로 생명의 불씨를 지켜내게 하던 섭리, 봄은 생명의 기운을 일으켜 내어 살아있음의 환호를 터트리는, 참으로 성스러운 역사이다.
뜨락으로 나갔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상큼한 봄 내음, 눈으로 감지하는 꿈틀대는 생명력, 이는 오직 봄에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현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삼라만상이 생명으로 넘치는 때, 문득 사람만 유독 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리 느끼지 못하고 된 다음에야 깨닫는 존재, 그렇기에 생명의 존엄성도, 생명에의 경외심도 덜하고, 하루살이처럼 그날그날 살기에만 급급해하는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희망과 만족하지 않으면 자연 삶에 대한 감사도 없을 것이고, 감사를 모르다 보면 행복 또한 느끼지 못하는 것이리라. 어쩌면 생명에 대한 감격도 행복을 느끼는 것과 같을 것 같다.
나와 가까운 수필문학가 y 선생은 지금 혈액암으로 투병 중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의 검사 결과에 따라 다음 한 주간의 치료 계획을 세운다. 그는 내게 ˝나는 일주일씩 삶을 선지급 받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 가면 과연 또 일주일의 삶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까, 그는 병원에 오는 날 전날 밤은 아무리 피곤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했다.
지난주엔 3주째 혈소판과 백혈구 수치가 떨어져 만약에 이번에도 또 떨어지면 끝이라는 생각에 밤 내 주소록을 정리했다고 한다. 꼭 연락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면서 그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그 시간에 옆방에서는 어머니와 남편과 아들이 그를 위해 밤을 새우며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찾아온 병원이었다. 가슴을 조이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혈소판 수는 떨어졌지만, 다행히 백혈구 수는 떨어지지 않았으니 한 주 더 두고 보자는 의사의 말에 그나마 긴 한숨을 토해내며 그는 또 뜨거운 눈물을 흘려냈다. 1주일의 삶을 선물 받는, 생명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감격이었다.
삶과 죽음 사이의 얇디얇은 칸막이를 붙들고, 이쪽일지 저쪽일지 안타까움에 떨고 있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면 숨을 쉬고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게 되리라.
일주일에 한 번씩 그와 나는 만난다. 내가 아는 그는 전에는 백합화였다. 그러나 지금은 민들레이다. 아니 백합이 아닌 민들레이길 바란다. 고귀한 화려함보다 끈질기고 진한 생명력이 더 필요한 그다. 그는 또 ˝내가 회복되면 사랑의 빚을 갚는 일에 남은 생을 살겠다˝고 말한다. 그에게 허락되는 한 모금의 시원한 물, 따신 햇빛 한 줌, 서늘한 바람 한 점, 그리고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요 귀한 선물들이다.
뜨락에는 여전히 생명의 축제가 한창이다. 꽃들이 지자 이번에는 이파리들이 자기들의 세계를 선포해 버린다. 꽃이 아름답지만 갓 피어난 이파리들도 꽃들 못지않다. 꽃이란 열매의 바로 앞 단계가 대부분인데 봄꽃들은 왜 꽃을 먼저 피우고 잎이 나중일까?
어김없이 해마다 제때 피고 지는 꽃들을 보면서 또 한 번 부끄러워진다. 저들이 하는 일에 얼마나 충실히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됨이다. 지난해에도 그랬던 것처럼 올해에도 어김없이 때를 놓치지 않고, 거르지도 않고 해내고 있는 저들의 일, 스스로 알아서 해내고, 더함도 덜 함도 없이 자기 몫에 충실한 모습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을 한없이 무색게 한다. 모든 것을 순리로 펼쳐 가는 아름다움이다. 나올 때와 들어갈 때, 취할 때와 버릴 때, 맞을 때와 보낼 때를 아는 슬기로움이다.
생명이란 바로 순리일 것 같다. 봄은 사람들에게 순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순리는 질서가 아닌가. 분수를 지키는 것이고, 기다리는 것, 욕심부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한 주일의 삶을 선물 받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를 위해 기도하는 수많은 사랑의 손길들이 그를 붙들고 있음을 보았다. 살아있음이란 홀로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랑의 부추김 속에 세움. 받고 있음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 나도 확인해 볼 것이 있다. ´있다, 분명히 있다.´ 그렇게 많은 눈이 내리고 유난히 춥기도 했던 지난겨울을 용케 버티고 싹을 틔워내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허물어버린 집터의 가장자리에서 커가고 있던 모시 뿌리를 캐어다 우리 아파트 동 앞 뜨락에 심었던 것이 몇 년 전, 나는 매해 새봄이 되면 뿌리가 훨씬 더 많이 뻗어간 채 다시 싹터 오르는 모시 나무를 확인하는 것이 행사처럼 되어버렸다.
반겨줄 아무도 남아 있지 않기에 이젠 고향을 잃어버린 셈, 그러나 그 뿌리 몇 개를 옮겨다 심어놓고 해마다 하나둘 더 늘어나는 모시 대를 확인하는 것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즐거움이 되고 있다.
뿌리가 뻗어가고, 대가 자꾸 올라와서 근방이 온통 모시밭이 된다면 내 기쁨도 그만큼 커질 것 같다. 지난해엔 모시 잎을 따다 모시떡을 해 먹었다.
그녀의 투병 속에서 내가 이렇게 모시를 생각한 것도 그 끈질긴 생명력을 부러워함이고, 그녀가 이런 생명력으로 꼭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모시의 생사를 확인코자 한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남의 생명을 짓밟는 사람도 있고, 남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버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먹고살기 위한 직업이면서도 사명감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도 참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람이란 존재는 식물보다 못할 때가 있는 것 같다.
봄의 뜨락에서 바라보는 나무, 풀, 꽃 그리고 사람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고,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또한 귀한 일이다. 단돈 2만 원의 생명 수당을 받으면서도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대원들이나, 질병으로부터 생명을 구하기 위해 12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수술을 하기도 하는 의사들이나, 한 톨의 쌀을 얻기 위해 무려 아흔아홉 번의 수고를 해야 한다는 농부들이나 생명을 위해 바치는 열정이 있기에 이 땅은 살아있는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제 곧 여름이 올 것이다. 그러나 봄의 뜨락에서 나는 봄의 색깔, 봄의 냄새, 봄의 느낌을 누리면서 살아 있음의 감격을 가슴 가득 안 는다.
식물에나 동물에게나 사람에게나 생명이 있을 때만 이 땅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리라. 올여름에는 왕성한 푸르름을 펼칠 나무들처럼 Y 선생에게도 생명의 환희가 넘쳐나는 계절이 되었으면 싶다.
아직 남아 있던 벚꽃 이파리 몇 개가 나폴 나폴 하얀 나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온다. 살아있음에 대한 감격을 잊지 말라는 듯.<지구문학> 2001. 여름호(테마특집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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