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우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들어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고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기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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