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담쟁이 넝쿨입니다.
가늘고 약해, 어딘가 쓸대도 없으면서
오래된 담벼락에 덕지덕지 엉겨올라가는
그 흔하디 흔한, 그런 담쟁이 넝쿨입니다.
당신이란 벽을 만나기 전엔
저는 그저 씨앗속에 잠든
피어나지도 않았던 존재였습니다.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그 하얗고 아름다운 외모와
도도함과 고귀함을 동시에 지닌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바람을 타고 당신께 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신께 도착하자,
당신은 웃으며 그 아름다운 귀퉁이 한자리를 내주셨고
저는 감히 당신속에 싹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윽고 조금씩 가지를 키우고
아름다운 당신을 조금씩 끌어안아갔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조용히 조용히.
따뜻한 햇살속에
당신이라는 벽에 붙어서 살 수 있어서
저라는 담쟁이 넝쿨을 너무 행복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가 너무 자라서
제 가지들이 당신을 다 뒤덮어 버렸네요.
처음에 하얗게 빛나던 그 외모는
이젠 푸석푸석한 가지들에 파묻혀 삭아가고
그 고귀한 모습도 주렁주렁한 잎들에 사라진지 오래내요.
햇빛 아래 멋지게 빛나던
옛날의 당신은 이제 어디로 갔나요.
제가 당신속에서 무럭무럭 자랄동안 당신은 어떻게 됐었나요.
당신을 지켜주겠다며 당신속에 새싹을 피웠었던 나인데
오히려 그 속에서 나는
지난 3년동안 당신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네요.
그 3년의 늘그막인
파란 하늘이 떠오른 계절의 지금에서
이제는 당신을 지키고자 합니다.
아낌없이 저를 보살펴 줬던 당신,
이젠 더이상 당신의 외관을 상하게 하지도,
그 아름다운 벽에 가지를 뻗치지도 않겠습니다.
당신의 하얀 벽면이 뜯어지면서도
나를 당신에게서 밀어내면은 혹 내가 죽어버릴까봐
이 하찮은 담쟁이 넝쿨을 붙잡아 주셨던 그대.
이제 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비록 당신속에서 더이상 자랄 수 없다해도
앞으로 두번다시 새싹을 피울 수 없다하여도,
지금껏 수많은 계절을 겪어오며
당신에게 붙어있었던 이 담쟁이 넝쿨은
너무 과분한 행운에 행복했었습니다.
저는 이제 죽을테지만
제가 뿌린 새 씨앗들은
또 어딘가에서 다시 싹을 피울것입니다.
만약
하늘이 제 맘을 알아주셔서
그 씨앗이 바람타고 다시 당신께 돌아온다면,
그런 동화속 얘기같은
아름다운 제 꿈이 이루어진다면,
혹 그런다면,
그땐
다시 한번 당신의 빈 자리에서
새로운 싹을 피워도 되겠습니까?
당신이 나중에
다시 이 씨앗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땐
아프게 하지않고
당신을 지켜드릴께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장경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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