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로 위의 우산

일반자료 2023. 6. 2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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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 위의 우산(실화)

비가 내리는 날,

우린 하염없이 철길 위를 걷고 있었답니다. 비는 부슬부슬 분홍빛 우산과 하늘빛 우산 위로 떨어지고 있었고요. 버려진 철길 위에서 현과 난, 저 멀리 아스라이 사라지는 철길의 끝을 묵묵히 바라보았습니다.

우린 문학 동아리<내일>이란 곳을 통해 알았습니다. 처음 만난 곳은 <날자, 날자, 다시 한번 날자꾸나>라는 카페였습니다.

이른 저녁 시간의 변두리 카페는 조용했습니다. 처음 눈길을 마주한 현과 난, 머뭇대기만 할 뿐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를 망설였습니다.

우린 이곳에서 만나기 전에 이미 전화로 통화를 했는데도요.

˝ 라스콜니코프를 닮은 것 같아요˝

현이 먼저 말을 했지요.

˝도스토옙스키의<죄와 벌> 나오는 주인공 말이에요?˝

˝예. 창백한 얼굴과 기다란 손가락을 보니 사색을 좋아할 것 같아요.˝

˝혹시 독심술을 배웠나요? 지금 내 모든 것이 들키고 있는 기분인데요. 하하˝

우린 그렇게 문학을 좋아해서 비발디의<사계> 중 가을의 선율이 흐르는 아담한 카페에서 만났지요. 우린 한 동네에서 몇 년을 같이 살면서 여태까지 한 번도 부딪힌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인연은 그냥 빗기고 나서 가는 법이 없는 것 같아요. 현은 그 당시 23세이며 아이들한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었고, 난 갓 결혼한 신혼으로 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었지요.

우린 주말이면 문학 모임인<내일>지에서 글쓰기와 회지를 준비하곤 했지요. 겨울날 창밖으로 한올 한올 눈 자락이 내리면 가습기에서 뿜어대는 수증기처럼 서로의 따뜻한 마음도 일렁이는 걸 느꼈습니다. 창가에 놓인 분란에선 은은한 향기가 실내를 채워주었습니다.

문학 사무실은 우리 동네에서 먼 곳이었습니다. 현과 난 주말이면 시외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많은 얘기를 했었지요. 그중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쁜 그녀는 초등생 시절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것입니다. 만지고 비비는 정도였지만 그녀는 그 일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성추행에 대한 사회적 법 제도가 서지 않은 시기여서 점점 몸은 말라가고 흉몽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부모는 더 볼 수 없어서 잠시 정신요양원에 보내기도 했답니다. 원래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언니가 배우던 피아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답니다.

나는 시골 시골에서 자랐지요. 아주 어릴 때 할아버지는 내가 너무 운다고 마루에서 마당으로 던졌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잔병치레를 참 많이 했습니다. 또한 훗날에 알게 된 일이지만, 독실한 불자이신 할머니께선 나를 이웃 동네의 절에 영혼을 인도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생애를 돌아보면 좋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병으로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시자 우리 칠 남매는 짐을 꾸려서 서울 달동네에 정착했습니다. 지지리도 가난한 생활이었지요. 화장실도 없는대서 어머니와 칠남매가 무려 3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이켜 보면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그 지긋지긋한 서울의 달동네를 벗어나 조용한 변두리 동네로 이사를 했고, 나는 말단 공무원으로 박봉도 감지덕지하며 결혼도 했습니다. 심성이 착한 아내는 같은 직장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의 진짜 인연은 단 한 번 온다고 했던가요? 그것도 거대한 해일처럼. 하지만 나의 경우는 아련히 그리던 理想이 한발 늦게 온 게 비극이었습니다. 우린 못다 한 전생의 인연을 만난 듯 돌이킬 수 없을 만치 깊은 사랑의 늪에 빠져버렸습니다.

심성이 착한 아내는 묵묵히 내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늦은 밤에 귀가해보면, 아내는 고단한 얼굴로 아이에게 젖병을 물린 채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볼 때면 내 가슴은 찢기는 듯 했습니다. 그 순간의 난 갈등에 몸부림치는 라스콜니코프가 되곤 했습니다.

겨울이 찾아들고 현과 난 <날자> 카페에 마주 앉았습니다. 우린 한동안 말없이 탁자만 응시하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어.˝

나는 회한의 담배 연기를 깊이 내뿜었습니다.

˝저도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이렇게 멀리 동행할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어깨를 가늘게 떨었지요.

겨울밤은 깊어가고 탁한 실내는 음울한 <치고이너바이젠>의 바이올린 소리만 창에 부딪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

지금 저는 비가 내리는 철길 위에서 눈빛으로 글을 씁니다. 먼 옛날 폐허가 된 철길 위를 다정하게 우산을 쓰고 걸었던 연인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문학을 통해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한 사람은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가정을 꾸려가고, 또 한 사람은 옛 추억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끝>

/문학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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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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