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난다는 감정이 내 경우는 `연민`이다.
가족은 물론이고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의 주름살이, 굽은 어깨가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다.
며칠 전에 시속 60km로 달려야 할 곳을 73km로 달렸다고 차를 세우게 한 교통경찰의 벌겋게 언 뺨을 보니 그 또한 안되어 보였다.
이런 감정의 변화를 나는 언감생심 나이가 드니 철이 드는 그거로 생각했었다.
우연히 접한 한 권의 책에서 내 연민의 정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건방진 감정인지 통렬히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스무 살에 수녀가 된 후 여러 나라에서 프랑스어와 철학을 가르쳤던 엘마뉴엘 수녀는 62살의 나이에 교사직을 은퇴한 뒤 23년간, 카이로의 빈민가에서 넝마주이들과 함께 생활했던 사람이다.
그녀가 모국으로 돌아와 그간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 놓은 책이 바로 <풍요로운 가난>이다.
책에서 수녀는 아흔이 넘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맵찬 목소리로 타인의 빈곤마저 생존마저 위협받는 궁핍 앞에서 무관심한 자세야말로 죄악이라고 분개한다.
˝나는 한 마리의 괴상한 오리다.
아흔두 살의 나이에도 부당해 보이는 것만 보면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꼭 분노의 원천 같다˝
는 고백은 내게는 차라리 호통처럼 들렸다.
아흔을 넘긴 노파가 분노의 목소리로 가난과 부를 불평등하게 공존하는 사회를 온몸으로 항거하고 있는데, 한창 젊은 나는 세상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니. 부끄럽다.
당장 생계가 곤란한 사람들의 삶의 무게를 나눠서 질 생각은 없이 그들의 처지를 안쓰럽다고 혀를 찬 꼴이니 이 얼마나 오만한 태도인가?
그러니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갖가지 고초를 겪으며 평생 모은 돈 5,000만 원을 선뜻 사회에 기증한 김군자 할머니의 기사를 접해도 그저 `아름다운 세상이야.`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내 주머니는 꽁꽁 옹점 매고.
이제야 정작 세상에 내놓아야 할 것은 `연민`으로 포장된 값싼 감정이 아니라 다만 몇 푼이라도 값지고 값진 기부금이란 사실을 나는 절감한다.
수입의 1%라도 나보다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마음이 정작 세상을 향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진정한 `연민`임을 깨닫는다.
눈물겹게도 중증장애인으로 정부에서 받는 보조금 20만 원이 수입의 전부인 사람이 매달 2만 원씩 그보다 어려운 이웃들을 향한 기부 하고 있다.
이렇듯 가난한 사람들이 외려 콩 한 쪽이라도 나누며 정을 쌓은 데 비해 물질이 풍부한 사람들이 자신의 그것을 틀어쥐고 앉아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며 고독을 달래고 있는 것이 어쩜 우리의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에마누엘 수녀가 말한 것처럼,
내 것을 나누는 삶에,
그래서 얻어지는 풍요로운 가난에 우리 모두 동참하자고
그래서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 유현미 - 월간 좋은 생각 -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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