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는 세 번 울었다. 물론 감동의 눈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은 아직 캄캄한 절망으로만 채워진 사회는 아니다. 나는 이 세 번의 눈물을 통해서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희망을 맛보았다.
어릴 때 내 별명은 ‘황소 울보’였다. 이 말은 ‘황소 눈’과 ‘울보’를 합한 것이다. 말 그대로 황소 눈처럼 유독 눈이 큰 꼬마가 걸핏하면 그 큰 눈 가득 철철 넘치도록 눈물을 만들어 낸다고 오빠들이 만들어 낸 별명이었다.
그때는 참 울 일이 많았다. 슬픈 만화를 보며 울었고, 친구가 눈을 흘기기만 해도 비죽비죽 울었다. 깊은 밤, 무서운 꿈을 꾸다 잠이 깨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먼동이 틀 때까지 울어댄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면서 점점 그토록 왕성했던 눈물샘은 말라갔고 눈물로 대처하기엔 세상살이 자체가 너무 냉정하다는 것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황소 울보 따윈 일찌감치 버리고 적어도 황소 뚝심 정도는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눈물이 너무 없는 사람을 만나면 왠지 정이 들지 않는다. 눈물 한 방울쯤 얼마든지 흘릴 수 있는 일을 목격하고도 민숭민숭한 사람을 보면 금속 인간인 것 같아서 다시 쳐다보게 된다. 눈물 흘릴 일이 전혀 없는 세상은 삭막하다. 특히 감동의 눈물이 생산되지 않는 세상은 정말이지 암흑이다. 그런 암흑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눈물들이 울기 좋아하는 ‘황소 울보’의 싱거운 눈물에 불과한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받기 위해서, 그 세 번의 경험을 설명할 작정으로 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의 눈자위가 시큰하기만 해도 나는 성공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우는 공연한 ‘황소 울보’로 남아 있다면 내 삶은 실패니까.
“그 첫 번째”
이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한 것이다. 게다가 나를 울린 존재도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아주 작은 사내아이였다. 그 아이는 얼마 전부터 우리 집의 가사 일을 도와주고 있는 아주머니의 외동아들이었는데 나는 아직 꼬마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아주머니는 남의 집에 일 다녀 본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토록 남부러울 것 없이 살다가 남편의 사업이 갑자기 기우는 바람에 지난 일 년 사이 평생에 걸쳐서 겪어야 할 고초를 한꺼번에 다 경험해 보았다는 사람이었다.
일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아들이라고 아주머니는 말했었다. 아들이 부끄러워할까 봐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많이 망설였는데 의외로 당당하게 받아들여 줘서 정말 고마웠다는 말도 아주머니한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만하면 꽤 속이 깊은 아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어느 비오는 날, 나는 그 어린 꼬마 때문에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아마 토요일이었을 것이다. 일을 마친 아주머니가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느닷없는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별안간 하늘이 캄캄해지고 먼 곳에서 번개까지 번쩍거리는 것으로 보아 비는 한바탕 기승을 부릴 기세였다. 우산 준비 없이 나간 사람들은 흠뻑 옷 적시기 딱 알맞은 날씨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뜻밖에 아주머니의 아들이었다.
“저, 일하는 아주머니 가셨어요?”
어리디어린 목소리로 아이는 그렇게 물었다. 나는 이 꼬마가 혼자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서 전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가 도착한다고 대답해 줬다.
그랬더니 꼬마는 정확히 몇 시쯤에 갔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아니에요, 엄마가 우산을 안 가지고 가셨거든요. 지금 우산 들고 버스 정류소에 나가서 기다리려고요.”
아직 응석이 남아 있는 그 목소리로, 비가 오거나 말거나 텔레비전의 만화 영화나 보고 있을 만한 그 연약한 목소리로, 비 맞을 어머니를 걱정하는 어린 아들 때문에 나는 그 사람 다음 말을 잇지 못하였다. 목이 메어서.
“그 두 번째”
얼마 전 나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잡지사 기자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서른이 넘었으니 노총각이라고 부를 만한 나이인데도 장가갈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이어서 나는 아주 반갑게 그 결혼식에 참석했다. 성격도 활발하고, 인물도 그만하면 훤칠하고, 더욱이 알뜰하기까지 해서 경기도 어디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놓고 있는 것을 잘 아는 나는 이 친구가 어지간히 신붓감을 고르다가 이제야 조건에 맞는 신붓감을 만난 모양이라고 지레짐작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신랑의 직장이 대우 좋기로 소문난 탄탄한 회사인데다 직업상 화려하고 빼어난 미녀 스타들만 만나고 다니는 기자인지라 자연 눈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짐작들은 송두리째 어긋나는 것이었다.
내가 결혼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신랑 입장이 있은 뒤였다. 그리고 곧이어서 싱글벙글 웃고 서 있는 신랑을 향한 신부 입장이 있었다. 어느 결혼식장이나 다 그렇듯이 그곳에서는 신부가 꽃 중의 꽃인 법이었다. 나는 목을 빼고 나타나는 신부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옆에서 8년 동안 열애를 하다가 이제야 가족의 허락을 받아 식을 올리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 줬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8년이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이유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 이유를 알았다. 신부의 양어깨 밑에 끼어 있는 한 쌍의 목발을 보고서였다.
그 아름다운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내내 싱글벙글 웃고 있는 신랑의 흰 이빨을 보고 있었다. 저렇게 웃는 것을 보니 첫딸을 낳을 것이 틀림없다는 하객들의 농담을 들을 때까지도 나는 잘 참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슬그머니 눈이 메워져서 뒤로 돌아섰다. 나는 그날 결혼식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주체할 수 없는 ‘황소 울보’가 되어 그 아름다운 결혼식에 행여 누가 될까 봐.
“그 세 번째”
이 세 번째 눈물은 엊그제 텔레비전을 보면서 흘린 것이다. 서울 근교 어딘가에서 사랑의 쉼터를 마련해 놓고 결손 가정의 어린이들을 돌보는 부부의 이야기를 취재한 아침 방송이었다.
엄연히 부모가 있지만, 그 부모들이 제대로 양육할 수 없어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 부모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복지 시설에 들어갈 수도 없는 그런 아이들이 열 몇 명, 이 불우한 아이들을 젊은 부부가 떠맡은 것이다. 부부는 제대로의 거처도 마련할 길이 없어 천막과 비닐로 얼기설기 얽어 놓은 어설픈 집에서 찬바람을 오직 사랑 하나로 녹여 가면서 이 아이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주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정도만 해도 내게는 울 이유가 충분히 갖추어진 셈이었다. 이 삭막한 세상에 자신을 헌신하여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 건강한 정신들을 만나는 일은 언제라도 감동적이니까. 문제는 어느 순간에 우느냐, 하는 것만 남아 있었다고나 할까.
그럴 만한 순간이야 많았다. 술 취한 아버지의 매질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왔다는 사내아이의 주눅 든 얼굴, 목 부근이 썰렁한 스웨터 차림으로 해바라기를 하고 서 있는 대여섯 살짜리 여자아이의 맑고 동그란 눈. 제발 도망치지 말고 이곳에서 맘 잡고 살아주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두 부부의 소박한 희망, 열 번도 더 넘게 도망쳤다가 지치면 사랑의 쉼터로 되돌아오곤 했다는 한 소년의 학교 가는 뒷모습.
그리고 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감자를 구워 먹는 어느 저녁의 장면이었다. 앞니가 빠진 개구쟁이 소년이 아버지(물론 ‘사랑의 쉼터’에서 자신을 돌봐주고 있는 현재의 아버지) 무릎에 앉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자신의 꿈을 털어놓았다.
“이담에 어른이 되면, 돈 많이 벌면, 여기에 삼 층짜리 집을 세울 거예요. 그래서 삼층에는 형이랑 누나가 살고, 이층에는 내 색시랑 내가 살고, 일 층에는 아버지하고 엄마하고 사는 거예요. 이담에 내가 돈 많이 벌면 따뜻한 물도 펑펑 나오게 하고, 이만한 세탁기도 사서 엄마랑 아버지랑 함께 살 거예요.”
그 많은 아이가 벗어 놓은 옷을 세탁기는커녕 더운물도 없이 날마다 팔목 아프게 빨아대고 있던 쉼터의 젊은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울었다. 그리고 나도, 꼭 그렇게 웃으며 울었다.
/양귀자 - 엄마는 생각쟁이 - 시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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