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
삼라만상이 비치는 종이거울.
겨울 :
깊은 안식의 시간 속으로 눈이 내린다. 강물은 얼어붙고 태양은 식어 있다. 나무들이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회색 하늘을 묵시하고 있다. 시린 바람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히고 차디찬 겨울비가 독약처럼 배어들어도 나무는 당분간 잎을 피우지 않는다. 만물들이 마음을 비우고 동안거 冬 安居에 들어가 있다. 모든 아픔이 모여 비로소 꽃이 되고 열매가 됨을 아는 날까지 세월은 흐르지 않는다. 겨울도 끝나지 않는다.
방랑 :
아무런 가는 곳도 없이 떠도는 일이다. 떠돌면서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는 일이다. 외로운 목숨 하나 데리고 낯선 마을 낯선 들판을 홀로 헤매다 미움을 버리고 증오를 버리는 일이다. 오직 사랑과 그리움만을 간직하는 일이다.
망각 :
세월의 무덤 깊이 과거에 대한 기억의 시체들을 완벽하게 암장시켜 버리고 마침내 모든 번뇌와 무관해져 버리는 상태.
바람 :
휴짓조각들이 을씨년스럽게 날아오르는 겨울의 공터에서, 개나리가 오스스 꽃잎을 떨고 있는 봄날의 담벼락 밑에서, 바다가 허옇게 거품을 뿜으며 기절하는 여름의 해변에서, 낙엽들이 새 떼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는 가을의 숲속에서 시각장애인도 바람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청각장애우도 바람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바람은 살갗만을 적셔주는 대지의 입김이 아니라, 온 가슴을 적셔주는 신의 입김이기 때문이다.
아침 :
자명종이 수험생들의 고막 속에다 비명 같은 경보 신호를 발사하고 직장인들이 아내의 발길질에 걷어채며 소스라치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면 하루의 전쟁이 시작된다. 인간들은 대개 현실에 소속되어 있고 시간의 위수령을 이탈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행복이라는 이름의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날마다 단독으로 적진에 뛰어든다. 인간들은 자신을 병사이면서 병기라고 생각한다. 병사가 꼬질대에 기름칠을 해서 총구를 쑤시듯이 칫솔에 치약을 발라 이빨을 닦고 총열에 탄알을 장전하듯이 식도에 밥 덩어리를 밀어 넣는다. 행복이라는 이름의 고지는 금력과 권력을 무기로 앞세운 자들에게는 가깝게 느껴지고 청렴과 결백을 무기로 앞세운 자들에게는 멀게 느껴지는 장소에 있다. 대개의 인간이 아침마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집을 나선다. 집을 나서면 대문 바깥이 모두 적진이다. 이 세상 생명체가 모두 적군이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이름의 고지가 바로 자기 마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은 단지 아침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에게 경배한다. 아침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찬란하지는 않은 것이다.
조간신문 :
아침마다 담 너머로 던져지는 우리들의 생활기록부다. 하루가 시작되는 문설주에서 거울처럼 들여다보이는 우리들의 일상사다. 비바람에 펄럭거리는 세상도 보이고 눈사태에 휩쓸려가는 세월도 보인다. 자유의 새순이 돋기도 하고 독재의 사슬이 번뜩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조간신문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침에만 배달되지는 않는다. 산간벽지에서는 석간구문夕刊舊聞으로 둔갑해서 이틀쯤 늦게 배달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정기구독자들은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산간벽지에서는 세월도 이틀쯤 쉬었다 가기 때문이다.
일회용 :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용품이다. 자연적인 용품과 인위적인 용품이 있다. 탄생도 일회용이고 죽음도 일회용이다. 처녀도 일회용이고 동정도 일회용이다. 일회용 종이컵도 있고 일회용 라이터도 있다. 일회용 주사기도 있고 일회용 반창고도 있다. 전자는 자연적인 용품이고 후자는 인위적인 용품이다. 그러나 물질이 인간을 우선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일회용이 되고 만다. /이외수 -시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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