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핀 꽃

일반자료 2023. 3. 2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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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

일제 강점기에 희생된 일본군 위안부들이 모여 사는 나눔의 집 동산에선, 이들을 위로차 오는 객들을 환영이라도 하듯 우거진 녹음 사이로 새들의 날갯짓이 부산스럽다.

해방과 함께 돌아온 위안부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 여자로서의 삶을 외면당한 채 세상을 떠돌다가 늙고 병들어 비로소 정착하게 된 곳이 이곳 나눔의 집이라고 하였다.

나눔의 집은 듯 있는 독지가의 도움과 국민의 성원에 힘입어 마련된 곳이라는 안내자의 설명이다. 이곳엔 10여 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서로의 상처를 위무(慰撫)하며 살고 있었다. 도란도란 들려오는 얘기 소리가 정겨웠다. 늦게라도 행복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이들을 바라보는 방문객의 눈가엔 촉촉이 이슬이 맺힌다.

일본은 자국을 비롯해 전쟁으로 점령한 나라들에서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했는데 그 수는 5만에서 30만으로 추정되고 특히 조선 여성들을 군 ´위안부´로 광범위하게 동원하였다고 한다.

국토 이용률이 16%밖에 안 되고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3위를 차지하는 이 나라에 잦은 외세의 침략으로 가난은 민족의 숙명일 수밖에 없었고 주권을 잃은 민족의 수난은 유교식 교육을 받고 자란 이 땅의 여인들을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 속으로 내몰았다.

˝임진왜란 때 졸지에 왜군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서울의 사녀(士女)들이 한강 변에 밀어닥쳐 배를 못 잡아 아우성을 쳤다. 징파(澄波) 나루에서 한 양반집 규수가 손에 끌려 다행히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때가 한강 중류쯤 이르렀을 때 일이다. 구원받은 이 규수가 투신해버린 것이다. ˝외간 남자의 손에 몸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부도로서 실절(失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남자의 손이 여자의 몸에 닿는다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전통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치욕적인 삶을 살았던 여인들이 이 땅에 발을 붙이기가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죽음을 택한 위안부들이 부지기수라고 하니 그 원혼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나눔의 집엔 일본군 위안부들의 치욕스러운 삶을 끌어안은 위안부 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역사관은 제1전시장 증언의 장, 제2전시장 체험의 장, 제3전시장 기록의 장, 제4전시장 고발의 장, 제5전시장 정리 맹세의 장, 제6전시장으로 옥외 광장으로 되어 있다. 위안소란 일본군 문서에 의하면 ´군 위안소, 군인클럽, 군인 오락소 혹은 위생적인 공중변소로 불렀다고 하였다.

역사의 죄인인 양 고개를 떨구고 제1전시장인 증언의 장에 들어서니 일본군 ˝위안부란 일제시대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반복해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일컫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위안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 군인들의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울분보다도 수치심에 절로 고개가 움츠러든다.

증언에 의하면 대개 아침부터 초저녁까지는 병(兵), 초저녁부터 7∼8시까지는 부사관, 야간에는 장교를 상대하였다고 했다. 하루에 10명 내외, 많게는 30명까지는 상대해야 했고, 주말에는 훨씬 많았다고 한다. 주말이 돌아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고 ´위안부´들은 증언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이처럼 악랄한 방법으로 식민지통치를 한 나라가 또 있을까.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서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라고 천명을 한 김학순 할머니의 한이 서린 글귀가 나의 옷깃을 잡는다.

˝일본에 억울한 일이 많고, 내 인생이 하도 원통해서 어디에다 이야기라도 하고 싶어서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말하게 되었다˝라는 할머니의 글귀가 내 마음에 전이되어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숨을 몰아쉰다.

가까스로 추스르고 한 발자국 물러서니´ 못다 핀 꽃´이란 명제 아래 단아한 소녀의 초상화가 내 앞을 막아선다.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이 초상화는 자신의 자화상인 듯싶다. 그림 속의 할머니는 16세 소녀의 모습으로 머물고 있다.

16세 이후의 기억들과 결별하고 순결했던 소녀 적의 기억들만 지금까지 부둥켜안고 살았나 보다. 억울해서 늙을 수 없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제3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전시장 안에 들어서니 내 어머니를 닮은 인자한 모습의 강덕경 할머니가 나를 반긴다. 한(恨)에 젖은 내 인생의 기록이라며 빼앗긴 순정 등 30여 점의 유품들이 할머니의 삶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나눔의 집 병구완일지는 할머니가 ´위안부´ 생활로 얼마나 고통을 받고 살았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강덕경 할머니는 진주에서 태어났다. 1944년 고등과 1학년에 다니던 할머니는 일본인 담임선생의 권유로 여자 근로정신대로 일본에 가게 되었다. 힘도 들고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도망을 치다가 일본 군인에게 붙잡혀 ´위안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해방을 불과 1년 앞두고 일어난 일이라 더욱 안타까움을 사게 한다. 패전 후 ´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시달리다가, 1992년 망설임 끝에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세상에 밝힌다. 할머니의 딱한 사정이 계기가 되어 나눔의 집이 문을 열게 되었다고 하며, 할머니는 나눔의 집에 입주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신만의 언어로써 사력을 다해 당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표현하고자 애쓴 흔적들이 곳곳에 역력하다.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죄와 정식배상을 요구하는 집회 현장에서 구호를 외치다 쓰러진 할머니는 1년 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1997년 2월 폐암 등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처절한 절규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사죄는커녕 망발을 일삼아오고 있다. ˝조선은 일본의 속방이 아니고 또 식민지가 아니라, 일본의 연장˝이라는 망발을 해서 3.1운동의 불을 댕겼고, ˝36년간 일본의 통치는 한국인에게 베푼 은혜˝라는 망언을 했다.

그리고는 ˝일본의 조선 지배는 조선을 좋게 하려 한 것이다˝라는 등 망발을 끊임없이 해오고 있어 온 국민은 물론 위안부 할머니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이때마다 나는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현실정치에 실망하며 약소국과의 국민임을 비탄해 마지않았다.

나라 잃은 설움으로 수난을 당하는 쪽은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이 아니었나 싶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인질로 끌려갔던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 심양에서 돌아온 환향녀들은 갈 곳이 없었다. 화냥년이라 하여 사대부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인의 절개가 도덕의 척도로 평가되었던 시대의 인조는 최명길의 진언에 따라 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충청도는 금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回節江)으로 삼은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마음을 깨끗이 씻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라는 엄한 명을 내리고 있다.

심양에서 돌아온 환향녀들은 국법으로 다스리기까지 하여 귀가시키고 잇는 데 반해, 400여 년이 지난 일제 강점기의 환향녀들은 법으로도 보호를 받지 못해 귀가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다가 목숨을 끊거나 음지에 숨어 살다 병이 들어 죽어가곤 하였다.

아무리 異化에 냉담하고 同化에 민감한 우리 민족의 정서라곤 하지만, 역사에 희생된 저 못다 핀 꽃들의 절규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나라 잃은 설움으로 나는 평범한 여자의 길을 가지 못하고 세상 밖을 떠들다가 늙고 병들어 이곳에 정착하게 됐노라˝며 억울함을 호소하던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는, 역사관을 휘돌아 산 속의 메아리로 퍼져나갔다. 돌아오는 길 내내 이명(耳鳴)으로 들려와 나를 아프게 하였다.

이들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들이 모였으면 하는 바람을 이 순간 절실히 가져 본다. /신미자 -시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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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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