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밑에서

일반자료 2023. 3. 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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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밑에서

버스에서 내려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한두 방을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드디어 비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금세 빗줄기는 굵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좁은 골목길을 뛰어가면서 어디 비 피할 곳이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마침 한 허름한 집의 처마 밑이 눈에 들어왔다.

기와지붕에 슬레이트로 처마를 만든 곳이었다. 나는 두고 볼 것 없이 그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지고, 블록이 깔린 길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빗방울 꽃을 만들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고 난 뒤 가만히 보니 이 처마 밑에 먼저 들어온 손님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쯤 돼 보이는 꼬마 두 명이 비를 피해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머리보다, 아니 몸과 비교해 너무 크게 보이는 책가방을 멘 채 비 맞고 들어와 있는 꼬마들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잠시 후 과일 파는 아주머니가 처마 밑으로 들어오고, 반대편에서 신문 배달하는 소년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처마 밑의 넓지 않은 공간은 순식간에 비를 피해 몰려든 사람들의 피난처로 바뀌었다.

먼저 들어와 자리 잡은 사람들은 점점 좁아지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중 들어온 사람들을 보면서 덜 젖은 자기 자신에 대해 위안을 얻기도 했다.

계속되는 거센 비 때문에 집에 갈 일이 걱정되어선지 두 꼬마는 잔뜩 긴장한 채 염려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좀 편안하게 해 주려고
‘얘들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런 소낙비는 곧 그치는 법이란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고 난 후 나는 금방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더욱 거세게 비가 쏟아지는 게 아닌가. 마치 내 예언을 일부러 비웃기라 도하듯이. 말없이 긴장해 있던 아이들도, 비만 탓하며 하늘을 쳐다보던 아주머니도 나의 몇 초 앞도 내다보지 못한 엉터리 예언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신문 배달 소년도 내 눈치를 보면서 웃음을 참다가 따라 웃었다.

그때 누가 지나갔더라면 이상하게 생각할 만큼 처마 밑 사람들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웃었다. 그리고 처마 밑에선 아주 재미있는 풍경이 벌어졌다.

과일 파는 아주머니가 몇 개 안 남았다면서 복숭아를 한 개씩 꺼내 주셨고, 신문 배달하는 소년은 남은 신문지를 가져다 깔고 앉으라고 내주었다. 꼬마들은 신문지로 모자를 잡았다. 과일 아주머니가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꼬마들에게 아무 노래나 하나씩 부르라고 했다.

망설이던 아이들은 둘이 의논한 뒤 “퐁당퐁당”이란 노래를 마치 학예회에서 발표하듯이 불렀다.

비는 언제부터인가 관심 밖으로 사라졌고 처마 밑 분위기는 모두 한마음으로 따뜻하게 자연스러워졌다. 장대비 같은 빗줄기 때문인지 지나가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골목길 한 허름한 처마 밑에서 다섯 사람의 특설 무대가 마련된 듯했다.

바로 앞집은 새로 지은 빨간색 벽돌의 이층집이었지만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반면에 좁은 공간의 처마 밑이 정겹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얼마 후 비는 그쳤고, 모두 다른 방향으로, 몇몇은 같은 방향으로 흩어지면서 마치 오랫동안 사귀었던 사람들을 보내듯 섭섭한 마음으로 인사하였다. 그렇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고 흐뭇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이 마치 소나기가 쏟아진 후 무지개가 생기는 아름다움처럼 내 마음을 새롭게 하였다. / 황영자 - (문구사 경영) 정채봉, 류시화 엮음 / 작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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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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