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일반자료 2023. 2. 22. 14:42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은행나무

세종로에 가면 은행나무가 많다. 어찌 세종로뿐이랴. 내가 나가는 사무실 앞길에도 가로수로 은행나무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은행나무를 보게 된다. 전에는 땅 위에서 은행나무를 쳐다보는 것이었으나 요즈음에는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우도 많다. 사무실이 4층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심은 나무가 은행나무와 호두나무였다. 그때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학교에서 나눠 준 묘목 종류중 은행나무가 두 그루, 호두나무가 두 그루였다. 고향 집 뒤뜰에 심었는데 호두나무는 죽고 은행나무만 살았다. 아름드리로 자란 은행나무에서는 해마다 열매를 많이도 딸 수 있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다면 나무들에도 나무 나름의 격이 있으리라. 그 목격으로 본다면야 은행나무만 한 것도 흔치 않은 것 같다.

안양에서 은행알 200여 개를 싹을 틔워 기른 적이 있었다. 이놈들이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그중에서 일곱 그루를 데리고 와 한 울안에서 지낸 지가 18년이 되었는데도 은행 한 알을 맺지 않는 것이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도 이만하면 성년으로 대접을 받을만한 나이라서 아무래도 수놈들만 골라왔는가 싶던 차 저지난해 집사람이 하얀 열매, 백과를 한 됫박쯤 들고 와 보이면서 우리 은행나무에서 열린 것이라는 것이다. 은빛이라는 살구씨 같다는 은행이다.

알고 보니 뒷대문께 행랑채와 담장 사이 그것도 키가 한 길이 넘는 얼룩무늬 쥐똥나무를 집수리 때문에 뒷문으로 옮기면서 그 곁에다 꽂아 놓았던 놈에서 열린 것이다. 어쩌다 쥐똥나무 가지 사이로 몸을 치켜올려 사방으로 팔을 길게 뻗치며 목숨을 부지해 가는 것을 볼 때면 안쓰럽게 생각되기도 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놈이 이제는 두 길이나 되는 쥐똥나무 위로 훌쩍 키를 세우고 몸통도 제법 굵어진 것이다. 지난해는 닷 되 남짓한 은행을 거두더니 올해는 가지가 늘어지게 열매를 달고 서 있다. 어찌 갸륵하지 않은가.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입히지도 못했는데도 근근이 자라나 제구실해내는 자식을 보는 어버이를 떠올리면서 이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지난 세월을 짚어본다.

내 집에 일단 들어온 것이라면 풀 한 포기도 그저 뽑아내지 않는 성미인지라 여기저기 틈을 비집고서 심어 놓았던 은행나무들, 어찌 보면 제 운명에 내맡겨 두었던 나무다. 뜰이 좁은 것은 생각지 않고 욕심을 부린 탓이다. 뒷마당에 심어 놓은 놈 말고는 뒷대문께 은행나무 외에 다른 다섯 그루도 집수리할 때마다 이리저리 옮겨 심는 수난을 겪던 놈들이다. 오죽하면 집사람이 ˝나무들이 욕하겠다.˝고까지 했겠는가. 내가 집수리에 진력이 난 뒤에 비로소 한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기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었든지 근래에 와서 자라는 속도가 제법 빨라졌다. 그러기에 내 집에 있는 은행나무들을 동갑내기로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난의 정도나 심은 자리에 따라 키는 물론 몸통의 크기가 자란 자세가 각기 다르다.

그 중에는 뒷대문께서 열매를 달고 있는 암나무를 닮은 성싶은 놈 한그루가 있다. 키는 멀쑥하나 잎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가지들을 듬성듬성 달고 있는 자세가 열매를 앉히기에 알맞을 것 같다. 이놈 역시 심을 곳을 찾다가 안채와 행랑채의 통로 양쪽에 자귀나무와 대추나무를 마주 심어 놓은 틈을 비집고 꽂아둔 것이라서 잘 견디어낼 것 같지 않더니 이제는 다른 나무들 위로 훌쩍 커 오른 것이다. 아무래도 이놈이 효자 노릇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는 하나 워낙 고생을 많이 한 놈이라서 제구실하려면 몇 해는 더 몸을 가꾸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다른 네 그루는 덩치가 작기는 하나 나름대로 위로 뻗은 가지가 많고 수형이 더부룩하며 잎이 무성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뒷마당에 있는 놈을 닮은 것 같다. 내 집 은행나무 중 가장 사랑을 받으며 자란 놈이 뒷마당에 있는 놈이다. 이놈은 처음에 심었던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다. 어릴 적부터 허우대도 좋고 몸매도 탐스럽기에 햇볕이 잘 드는 뒷마당 복판에 심어 놓았었다. 여름에는 그늘을, 가을에는 황금빛 단풍을 보려는 심산에서다. 크고 작은 가지들이 많고 잎도 많은 왕성한 수세로 좁은 하늘을 온통 덮는지라 근년에 들어서는 오히려 한여름에 나뭇가지를 잘라내어 하늘을 틔워 바람이 통하게 해야 한다. 가을에는 단풍이 좋다 싶기가 무섭게 은행잎 쓸어내기에 바쁘다. 이놈이 나이가 들면서 은행이라도 열어 줄 것을 은근히 기다렸으나 아직 꽃도 열매도 보지를 못했다. 은행이 잘 열리는 뒷대문께에 있는 놈이 20살이라면 이놈은 30살은 됨직하다. 은행나무도 마주 봐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있다. 은행나무에 암수가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봄철에 꽃을 피웠다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나 이놈이 수나무인 것이 틀림이 없을 성싶다.

씨를 심은 뒤 손자 대에 가서나 열매를 볼 수 있다고 해서 공손수라고도 하는 은행나무의 암수를 외관만으로 구분하기는 어려우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쯤에 이르러 특징이 나타나는 것 같다. 어쩌면 암나무는 날씬한 미녀형이라고나 할까.

수형이 펑퍼짐한 암나무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미녀라도 몸매를 위해 자식마저 마다하지는 않는다. 열매를 위해서 가지 사이로 햇볕이 고루 들고 바람도 잘 통할 수 있는 모양새를 갖춘 것이 암나무라면, 허세를 부린다고나 할까 조금은 허풍스럽고 낭비성이요 대담하고 낭만적인 것이 수나무인 성싶다. 장끼와 까투리 같은 사연이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원정이 과목의 수형을 잡아주는 그 기법은 은행의 암나무에서 배운 것이나 아닐는지.

은행나무를 화석식물이라고 한다. 중생대의 쥐라기(Jura기)에 가장 번성했던 식물로, 화석에 나타나는 은행나무의 종류는 12종으로 그 화석은 유럽이나 미주에서도 발견이 된다. 그러나 그 생존연대는 가히 1억 5,000만 년이 넘는다. 때로는 얼음에 덮이기도 하고 때로는 열사에 묻히기도 했으리라. 그러면서 오로지 살아남은 한 종류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지역에 있는 은행나무다. 나비나 벌도 없고 새도 없으며 활엽수가 살아날 수 없던 쥐라기에 창조주가 지구상에 나무로서 먼저 내보낸 것이 겉씨식물(겉씨식물)인 은행나무요 소나무이고 세쿼이아다. 동양인에는 은행나무요 서구에는 세쿼이아가 있다. 침엽수이면서도 오리발처럼 생긴 잎을 가졌대서 압각수라는 별호까지 얻은 은행나무는 창조주의 시험을 수도 없이 치른 고달팠던 역사와 선조를 가진 나무다.

은행나무에는 병충해가 거의 없다. 미물인 해충이나 식물병원균마저도 은행나무의 장엄한 생명력에 경외하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공자께서도 은행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셨다던가. 향교마다 은행나무를 심는다. 수형도 좋거니와 가을에 단풍 또한 좋다. 예쁘게 생긴 황금빛 은행잎을 책갈피에 끼워보지 않은 소녀가 있을까.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목질로 무늬 또한 곱다. 따끈따끈하게 구워낸 구수한 은행알은 노랑 바탕에 연둣빛이 고운 만큼이나 술꾼들의 술맛을 돋구어준다. 은행 열매는 물론 잎 또한 강장, 보양을 비롯한 약재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인간을 위주로 할 때의 이점은 되겠으나 다른 생물들에게는 인색한 식물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꽃이 피기를 하나 아니면 향기가 있는가. 꿀이 없으니 벌, 나비가 찾아들 리 없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과육 그리고 단단한 열매껍질을 가진 은행 열매를 어느 동물이 즐겨할 것인가. 여기에도 조물주의 짓궂은 듯이 보인다. 아니면 태어나던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서 연유된 것일까. 달면 단대로 쓰면 쓴 대로 서로 어울리는 것이 자연 이치가 아니든가. 어찌 보면 외로운 나무다. 은행나무를 찾아오는 것은 오직 바람뿐, 꽃가루를 날라다 주는 것도 바람의 힘일 뿐이다.

은행나무는 토질을 탓하지 않는다. 가지가 심하게 꺾여도 견디는 것은 왕성한 맹아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몸을 감싼 나무껍질도 두꺼운 크르크질이 아닌가. 화재에 강하고 분진, 악취 등의 공해에도 강하여 방화림으로 심고 도시의 가로수로도 심는다. 내한성과 내서성도 갖춘 생명력 강한 나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역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 방어의 방책이리라.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의 수령 1,100년인 은행나무는 세종대왕 때에 당상질에 봉해지고 그 뒤로는 천왕 목으로 받들어 제사까지 드린다. 나라에 길흉사가 있을라치면 윙윙 운다는 이 나무에는 전설도 많다.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의 수명도 길지만, 은행나무 또한 장수를 누리는 나무다. 요즈음처럼 공해물질이 마구 쏟아지는 환경에서는 얼마나 오래오래 수를 누릴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은행나무의 조상, 그 유해인 화석연료를 이용하면서 공해를 유발하고 있다. 은행나무에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봄이면 황사가 날고 밤낮없이 뿜어내는 분진과 악취 속에서 산성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서울 거리에 쥐라기 그때를 살아온 은행나무가 많고 소나무가 늘어나며 메타세쿼이아가 모습을 보임은 어쩐 일인가./임억규-



'일반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의 노래  (0) 2023.02.22
인연  (0) 2023.02.22
아버지의 발자국  (0) 2023.02.22
우산  (0) 2023.02.22
슬픔과 영혼  (0) 2023.02.22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