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 1966.010316 응시
팔월의 아침저녁은 시원하다 . 그러나 기승을 부리는 한낮 여름 열기는 아직 호박잎이 느려지게 머물러 앉아 있다 . 무섭도록 내리 쬐는 불볕을 피해서 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나아간다 . 들판에는 풀 먹인 중이적삼을 걸친 농부만 하얗다 . 물고를 보느라 여기저기 분주히 걸음을 옮긴다 . 녹색 들판에는 긴 장마를 마무리하는 농부의 엎드린 모습이 흰 두루미 같이 널려있다 . 기차는 어느새 간역 ‘ 벽양 ’ 을 잠깐 스치고 들 한가운데 있는 마을을 흘러 보내며 지평을 어지럽게 끌어온다 . 동해의 수평선이 사라지고 방풍림 소나무 숲이 실오리같이 길게 늘어져서 빙그르르 돌고 있다 . 사발에 물 담은 듯이 가득한 푸른 들판을 축음기 판 돌리듯이 돌린다 . ‘ 통천 ’ 읍을 향해서 내닫는 기차화통에서 길고 우렁찬 기적이 울렸다 . 보아 , 벌써 읍에 들어가고 있나보다 . 힘차게 뿜어 올린 연기 그림자가 긴 객차그림자위에 덮쳤다가 사라진다 . 제방 둑에만 올라가면 바다가 보이는 곳 , 내가 살던 마을을 떠나서 넓은 벌판을 가로질러 내륙으로 들어온 것이다 . 산등성은 긴 능선을 따라 이어지고 그 능선이 끝나는 곳이 ‘ 금란 ’ 앞바다인가보다 . 나는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져있는 것을 느꼈다 . 하늘과 땅이 맛 닿은 곳 , 아무것도 없는 , 저 하늘 끝이 내가난 , 내가 자란 내 고향이다 . 잦지 않은 기차시간을 맞추어 타느라 일직 나서긴 했어도 싸온 도시락을 멋적어서 혼자 먹을 수가 없다 . 넓은 객차에도 드물게 손님이 있는지 , 통로엔 왕래가 없다 . 농사철인 때문이다 . 기차는 덜커덕거리고 몹시 흔들리며 ‘ 통천 ’ 역에 들어갔다 . 이곳에선 목마른 기차가 물을 먹고 가는 곳이라서 화통에는 시꺼먼 물주머니가 잇대어져있고 역무원들은 분주히 오간다 . 그러나 빨간 완장을 찬 기관사는 느긋하게 오른 팔을 창 밖에다 깊숙이 끌어내어 기차꼬리를 훑어보며 담배연기를 뿜어낸다 . 화통의 커다란 쇠 바퀴 밑에서 올라오는 집채 같은 김 뭉치가 담배연기를 삼켜버리고 말았다 . 기차는 헐떡거리며 ‘ 덕고개 ’ 를 넘었고 이어내리 달려서 낯 설은 들을 돌리면서 ‘ 고저 ’ 읍으로 빨려들어 갔다 . 산봉우리에 솟은 바위 , 바위의 색이 검고 칙칙하다 . ‘ 덕고개 ’ 까지만 내 고향 흙 바위이고 ‘ 덕고개 ’ 를 빠지면서 산이 검은흙으로 이색 ( 異色 ) 져서 이국의 산야를 보는 것 같다 . 개울의 모래자갈이 검고 깎인 절벽의 바위가 검다 . 푸른 초목을 제외한 모든 것이 검다 . 멀리 탄전이 보인다 . 뚫어낸 채굴 갈탄 찌꺼기가 풀어헤친 여인의 머리같이 검게 넓게 아래로 퍼져 내려있다 . 눈에 들어오는 내 고향마을들녘의 색깔은 푸른 일색에 흰색 흙살이 드러나는 것과 달리 ‘ 고저 ’ 의 들과 산은 푸른 일색에 검은 흙살이 드러나서 , 고향과 타향은 흑과 백으로 대조되었다 . 밟으면 부서지고 비바람이 불면 떨어져 나가는 화강암기운을 받아 물러빠지게 자란 내가 앞으로는 무쇠같이 단단하고 밟아도 부서지지 않고 비바람이 불어도 할퀴지 않는 현무암의 기운을 받으러 감히 진입하는 것이다 . 검고 칙칙한 전형적 공장지대 같았다 . 평화로운 마을을 점점 멀리 하는 것 같은 외로움과 그리움이 밀려온다 . 새로운 환경에 막다드린 내가 가는 곳은 예비소집 , 시험장 가는 길이고 그곳은 저 유명한 '관동팔경'의 하나인 ‘ 총석 ( 叢石亭 ) 정 ’ 등허리의 양지바른 곳이다 . 검은 운동장이 무섭기도 하려니와 정이 가지 않는다 . 아무려나 , 나고 자란 곳과 같기야 하랴, 하지만 이 곳도 딛고 넘어야할 내 앞의 길이려니 다짐하고 애써서 설레는 가슴을 달래어본다 . 교사는 검지 않았다 . 겉은 연한 녹색으로 칠해지고 교실 안은 희고 밝았다 . 정남향이여서 채광도 잘되어 북쪽복도까지 밝게 보였다 . ' 벽에 붙은 흑판'은 이때 처음 보았다 . 이색 진 책상의 모양이 좋아 보이기보다 교실이 남의 집 같아서 낯설었다 . 주의 사항이 있었고 수험표와 자리를 확인하고 곳 바로 역으로 달려가야 했다 . 내일의 시험을 위해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 시험시간과 아침기차의 시간이 들어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일 일이 불안하고 초조하다 . 이날만은 농사일과 아버지의 어려움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 사람의 사고는 깊이가 없나보다 ./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