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늘 그랬듯이 이즈음도 잊히지 않는 한 가지, 내 마음의 한구석에 자리하고서 떠나지 않는 아내의 기도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손자들 중 먼저 태어난 지윤이가 독차지하여 내게 들려주고 있다. 이토록 밝고 활기찬 모습 뒤에는 늘 보이지 않게 보살피리라고 여겨지는 먼저 간 아내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을 테지만 내가 달리 드러낼 수 없어서 마음 가누기 어렵다.
달리한 세대를 이어주는 이 한 가지, 보이지 않는 끈은 무엇인가? 그 것은 바로 아내의 기도다.
“하느님, 2년 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무엇 때문에 2년이란 한정된 삶을 애원했는가를 나는 아내에게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시한 부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마도 이승에서의 도리를, 남이 누리는 바 그 한 자락이라도, 누려보고 이승을 하직했으면 하는 생각을 품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서 시집보낸 딸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 누리는 꿈이라도 꾸었는지 모르지만 이루지 못하고 아내는 갔다. 한을 품고 갔으리라.
지윤이는 할아버지의 말소리를 엄마 뱃속에서부터 들으면서 매일 여의도 공원을 노닐었단다. 아빠가 지방에 계셨기에, 지윤이는 엄마 뱃속에서 할아버지하고 함께 푸른 숲을 마셨고 흙 향기 짙은 오솔길을 걸었단다.
이토록 인연 깊은 공원, 그 곳은 공원이 만들어 지기 전에는 넓은 아스팔트 광장이었었다. 이름하여 ‘여의도 광장’. 엄마는 ‘초딩’시절 그 아스팔트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철철 나도 울지도 않았단다. 아무렇지 않게 의젓했단다. 채우지 못한 시간을 버린 채 빌려온 자전거를 대여점까지 어른스레 타고 가서 반납했단다.
그러던 엄마도 세월과 함께 자라서 숲으로 변한 그 곳, 여의도공원에 너를 뱃속에 안고, 할아버지와 함께 매일 둘레 길을 몇 바퀴씩 돌았단다.
여의도는 아빠의 일터, 엄마의 지윤이 태교 터였단다. 지윤이는 엄마 뱃속에서 배 타듯 출렁이며 노닌 곳, 지윤이의 원초적 놀이터였단다.
이제 지윤이를 바라보며 칠십년 전의 나를 되비추어 보지만, 아스라이 떠오르다 마는 부모님의 모습을 되 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내 속내를 지윤에게 조차 말할 수는 더욱 없다. 세대를 달리한 같은 또래나이인 손자와 할아버지가 이 어그러진 시간을 조여 붙여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윤이와 같은 나이였던 나의 그 때를 끊어질듯 이어가는 내 못다 한 한을 지윤이가 풀어내어 꽃처럼 아름답고 알찬 열매로 다가오기 바라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지윤이가 엄마 아빠에게 사랑의 재롱을 한껏 안겨서 이 할아버지가 못한 부모님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내 대신 안겨드려서, 이 할아버지가 못다 한 효성, 불효의 한을 지윤이를 통해서 대리만족되기만을 바라는, 그런 드러낼 수 없는 내 속내이기 때문이다.
귀여운 지윤아! 지윤이는 이 할아버지가 네 나이에 어림할 수조차 없었던 넓은 세상을 네 가슴에 담았다. 이 할아버지의 속이 후련하도록 세상을 품어 안고 눈을 넓혔으니 그만큼 마음도, 몸도, 생각도, 함께 넓혀 자랐으리라.
부끄럽지만 지윤이를 위해서 밝힐 수밖에 없구나. 이 할아버지는 지윤이 나이에 이르기 까지 나고 자란 고향땅에서 이 백리 밖을 나가보지 못했단다. 귀 동냥으로 얻어 듣고 그림으로 본 서울 가보는 것이 꿈이었었지. 그 꿈을 생전에 이루었고 귀여운 지윤이를 열매 맺었으니 할아버지의 소원은 이루어졌단다. 기쁘고 가슴가득 뿌듯하단다.
이래서 지윤이는 할아버지와 먼저가신 할머니의 귀하고 소중한, 보배로운 열매이니라. 아직 덜 익은 열매이지만 한껏 보고 생각하고 익혀서 이 세상에서 일곱 색 무지갯빛을 내고야 말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할머니의 소원이 지윤이 네게서 이루어질 터이니 그렇다. 그렇다마다. 지윤이는 엄마 아빠와 더불어 이 할아버지, 먼저 간 할머니의 소원이 담긴 아름다운 열매이니 그렇다.
할머니는 이승에서 손자를 보지 못하고 가셨으니 늘 지윤이를 지켜서 저승에서나마 이승과의 연을 이어 아름답게 익은 열매로 익힐 것이다.
지윤아!
늘 발랄하고 구김살 없는 우리 지윤아!
무지개를 쫒아 달리는 건강하고 성실한 우리 손녀 지윤아!
부디 네 꿈을 이루는 그날 까지 하느님께서 할머니의 애틋한 바람을 담아 너를 돌보심을 잊지 말거라. 곁붙여 이 할아버지도 네가 맑고 밝고 환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8163.180507/외통 徐商閏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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