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깎으며
오랜만에
연필을 깎으며
행복했다
풋과일처럼
설익은 나이에
수녀원에 와서
채 익기도 전에
깎을 것은 많아
힘이 들었지
이기심
자존심
욕심
너무 억지로 깎으려다
때로는
내가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
대책 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아직도 내게
불필요한 것들을
다는 깎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런대로
청빈하다고
자유롭다고
여유를 지니며
곧잘 웃는다
나의 남은 날들을
조금씩 깎아내리는 세월의 칼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행복한 오늘
나 스스로 한 자루의 연필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깎이면서 사는 지금
나는 웬일인지
쓸쓸해도 즐겁다
/이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