剩喜南窓日稍遲(잉희남창일초지)
햇볕이 오래 머물러 남쪽 창은 너무 좋은데
微風舞雪不成吹(미풍무설불성취)
산들바람이 눈발을 날리나 그리 세게 불지는 않네.
禽非易舌無陳語(금비역설무진어)
혀를 바꾼 것도 아닌데 새는 진부한 말이 하나 없고
樹欲生花自好枝(수욕생화자호지)
꽃을 피우려는지 나무는 절로 가지가 예뻐지네.
春事未應多異巧(춘사미응다이교)
봄이 찾아온들 특별히 멋진 일을 하지 못하니
客懷聊亦動新詩(객회료역동신시)
나그네 심회는 시나 새로 지어 풀어볼까.
鏡中白髮三千丈(경중백발삼천장)
거울 속에 흰 머리가 삼천 길로 늘어났으니
休道緣愁不入時(휴도연수불입시)
괜한 걱정 하지 않는 나이라고 말하지 마라.
선조 때의 문인 간이(簡易) 최립(崔岦·1539∼1612)이 1594년 중국으로 가는 숙소에서 지었다. 왜적을 막으려고 군대 파병을 요청하러 가는 길이었다. 초봄이라 남쪽 창가에는 햇볕이 들어 따뜻하다. 볕을 받으며 앉았더니 눈발이 조금 날리기는 해도 그리 춥지 않다. 새들은 혀를 바꾼 것도 아닐 텐데 활기차고 신선한 목소리로 지저귀고, 나뭇가지는 물이 차올라 꽃이 필 것 같다. 풍경은 어느새 봄을 재촉하건만 영 기분이 좋지 않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백발이 눈에 들어온다. 걱정이 없는데도 백발이 저리 많을까? 걱정이 무엇이냐고 묻지는 마라.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