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 너머에서
넘어오는 바람이 차다
아무도 다가서지 못하는 날개 펼치고 은빛의
차디찬 한낮
빙벽으로 서 있다
푸른 결기 음각한
팻말을 둘러치고
한파 속 흰 뼈마디 드러낸 준엄한 적요
절필의 막막함이여,
백지(白紙) 펄럭인다
/조영일(1944~ )
한파는 차가운 고요를 데려온다. 추위가 셀수록 단단해지는 고요 속. 눈이라도 쌓이면 '아무도 다가서지 못하는 날개'를 펴듯 산들도 한층 준엄해진다. 한낮마저 '은빛의 차디찬' '빙벽'을 둘러치니 인내의 심금을 재듯 깊어지는 나날이다.
그 너머에서 더 '준엄한 적요'로 빛나는 설산. 범접 못 할 세계의 비의(秘儀)인 양 높이 솟은 설산은 그래서 더 푸른 매혹이다. '신의 영역'이라면서도 인간의 발로 아니 온몸으로 굳이 오르는 사람들은 그 미답(未踏)에 혼이 팔린 것일까. 영화 '히말라야'의 관객들도 생을 걸어야만 잠시 서본다는 설산의 높디높은 고독에 더 매료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설산은 '절필의 막막함'과도 닮았다. '백지(白紙)'만 준엄하게 펄럭이는! 새해도 그런 백지 위에 새로 쓰는 기분으로 삼가며 마주한다. 새로 써나갈 새 약속들을 음각하듯 숙이며 또 적어본다.// 정수자 시조시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