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다는 말
어머니가 심어놓은
텃밭머리 호박넝쿨
더러는 잎이 지고
줄기도 물이 빠져
물소리 가다가 멈춰
마른 침을 삼킨다
끊긴 듯 굽은 길을
구불텅 따라가면
못내 아쉬웠나
심지 돋운 늦꽃 하나
늦가을 기운 햇살도
길을 슬쩍 비킨다
그래 시든다는 것은,
힘줄만 앙상하다는 것은
한 생을 휘돌아나간
뜨건 피의 마지막 말
땅에다 맨몸을 뉘고
상처를 묻는다는 말
/심석정
세상이 조금씩 헐거워지고 있다. 잔디가 시들며 공원이 휑해지고 단풍이 시들며 거리도 조금 더 성글어진다. '마른 침' 삼키는 물소리도 머뭇머뭇 수척한 기색을 드러내고 사람들도 열기가 가신 표정이다. '텃밭머리 호박넝쿨'도 끝까지 피운 '늦꽃'을 용을 쓰며 갈무리할 때, 늙은 호박은 또 호박대로 두리둥실 살을 더 익힌다.
그러므로 '시든다는 것은' 돌아가는 것이겠다. '한 생을 휘돌아나간 뜨건 피의 마지막 말'이라니, 그 모든 시간을 뉘어놓는 것이겠다. '땅에다 맨몸을 뉘고 상처를 묻는다는 말'임을 짚어보면 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지움의 흔적이다. 살아온 소임을 다하듯, 시듦이란 곧 온몸을 말리며 자신의 삶을 거두는 일이다. 잘 시들면 잘 거두는 것이거니!//정수자 시조시인/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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