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하면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탑과 석불을 합쳐
100여개 남짓밖에 안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11세기 초반 운주사 창건 이후
수많은 전란과 재난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80년대만 해도 이 운주사 돌탑과
돌부처 바로 앞까지 논밭이 있어서 이곳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인근의 노인들에 의하면 인근 마을 사람들 중에 자기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을 때
이곳 돌부처와 돌탑을 가져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이니
옛기록이 그저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석불좌상의 높이는 12.73m이고 석불입상의 높이는 10.30m인데 이 두 석불은 대체로
북쪽 다리 부분이 남쪽 머리 부분보다 약 5도 높고 입상쪽이 좌상쪽보다 약 5도 높게
경사져 있다. 이 와불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 이곳에 옮긴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있는 암반에 그대로 조각한 것이다.
문제는 고려 초기 당시에 어떻게 이 무거운 불상을 일으킬 생각을 했었느냐는 것이다.
아니면 이곳의 다른 불상들처럼 파격적인 모습을 구상하여 처음부터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불상을 조각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가 열반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측와불은 인도나 스리랑카 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운주사의 와불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인도나 스리랑카의 측와불은 석가모니가 누워서 손으로 턱을 괴거나 받친 상태인데
운주사의 와불은 그저 정면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또 좌상과 입상의 다리 부분에는 떼어 내려고 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틈이 있다.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고 떼어 내는 공정을 마치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일부에서는
추측하기도 하지만 처음 불상을 조각한 후 생긴 흔적인지, 아니면 후대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두면서 세워 보려고 만든 흔적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운주사에는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석탑은 모양을 제대로
갖춘 것이 18기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운주사 입구에 보이는 구층석탑, 칠층석탑,
특이하게 생긴 원형다층석탑(연화탑), 원형석탑(실패탑), 오층석탑(거지탑),
원구형석탑(항아리탑) 등이 있다.
이 석탑들은 몇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먼저 전형적인 우리나라 석탑형식으로 탑신과
옥개석이 네모 반듯한 모양을 이룬 것과 탑신이나 옥개석이 원형을 이룬 것,
벽돌로 쌓아서 만들어진 전탑 형식, 지대석 위에 기둥 형태의 거친 석재를
얹어 놓은 형식 등이 있다. 운주사의 이 탑들이 이렇게 모양이 제각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운주사는 창건에서 폐사까지 3~4차례의 중수가 있었는데 이 시기마다
새로운 석탑들이 세워지면서 모습이 서로 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운주사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칠성석(七星石)이다. 운주사 입구에서 바라보면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놓여져 있는 칠성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일곱 개의
자연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배치했는데 그 모양은 북두칠성의 형태와 똑같다.
그래서 운주사는 일반 불교사찰이 아니라 칠성신앙과 관련된 도교사찰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었다.
이 칠성석의 직경, 원반끼리의 중심각, 각 원반 중심간의 거리, 돌의 위치와 두께 등이
현재 북두칠성의 밝기나 위치와 똑같은 비례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칠성석의 이러한 천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누가, 왜, 하필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만들었는지, 또 천불천탑과의 관계 등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는 실정이다.
4. 한국의 미스터리 - 팔만대장경
깊이 14.8m, 높이 9.3m의 석굴 안에 본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은 1.58m의 좌대 위에
3.26m의 거대한 불상으로 굽타 양식으로 만들어 졌다. 석굴암의 제작에 사용된 화강암은
무려 3000여톤에 이른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세워진 이 석굴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석굴의 평면은
반지름 12척(3.3m)으로 정확한 원을 이루고 있으며, 입구의 너비나
본존 석불의 높이 역시 반지름이 12척으로 되어 있다.
옛날엔 하루의 길이를 12시간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하루의 길이와 일치한다.
그리고 원은 1년 365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석굴암이 뛰어난 것은
천연 동굴이 아닌 인공굴 안에 만들어 졌으며, 구형, 삼각형, 사각형,
팔각형 등의 기하학적 구성에 의해 완벽한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좌대 방향은 방위각 117도(동으로부터 남으로 27도 방향)라고 하고 본존불은
좌대를 기준으로 동에서 남으로 4도가 틀어져 있다고 한다. 즉, 현재 본존불은
방위각 121도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가 수리공사를 할 때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잘못해서 그 방향이 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본존불과 좌대를 만들 때 애시당초 그 방향이 틀렸을 리 없고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뒷부분에 금이 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주의 일출
방위각을 보면 동지 때는 119도, 춘·추분 때는 약 90도, 하지 때는 약 60도로
나타나는데 석굴암의 본존불에는 사시사철 햇빛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석굴암 아래에는 토함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마시는 감로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물은 석굴암 내의 본존불상 바로 밑부분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라고 한다. 그 물줄기는 인조 석굴을 떠받치는 암반 사이를 흘러
석굴암 내의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하면서 석굴암의 외벽과 밑을 시멘트로
짓이겨 놓고 물줄기도 석굴암의 바깥쪽으로 돌려 놓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와 광복 후 후손들의 손에 의해 석굴암은 그 원형을 상실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우리는 아직도 예전 석굴암의 건축 원리를 알지 못한다.
1000여 년이나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옛 선조들의
석굴암 건축 비법이 신기하기만 하다.
7. 한국의 미스터리 - 마이산 탑사
지난 10여년 동안 국내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화석 수는 실로 엄청나다.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50여개 지역에서 6천5백여개의 발자국이 발견됐다.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경우다. 이곳에 공룡 발자국이 밀집된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완전한 골격화석은 왜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공룡 화석에
담긴 1억년 전 한반도의 비밀은….
82년 이후 한반도 특히 영남지역에서는 매년 새로운 공룡 발자국 산지가 보고되고 있다.
이제는 발자국 산지의 발견은 더이상 뉴스 가치가 없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흔한 일이 돼버렸다. 특히 고성 덕명리에서는 공룡의 종류가 적어도
사족보행(四足步行)의 용각류(龍脚類)가 3종, 이족보행(二足步行)의
조각류(鳥脚類)가 10여종, 이족보행의 수각류(獸脚類)가 2종이나 확인됐다.
경북 의성군 일대에서도 광범하게 공룡 화석들이 발견됐다. 86년에는 금성면 청로리
야산에서 공룡의 골격 부분화석이 발견된 이래 90년에는 금성면 제오리에서
공룡 발자국(천연기념물 지정)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봉양면 구미리에서 공룡 어깨뼈와 대퇴뼈가 발견됐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영남지역 이외에서는 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황리 일대에서 공룡 발자국화석이
다수 발견됐다. 이곳 9개 층준에서는 2백여개의 공룡 발자국이 발견됐는데
특히 익룡 발자국화석과 물갈퀴발 새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돼 주목을 끌었다.
이밖에도 국내에서 발자국화석이 1백개 이상 집단발견된 곳은 20여곳에 달할 정도다.
지역별로는 경상도 지역이 50여군데, 전남지역이 1군데, 북한 황해도 평산군
용궁리가 1군데 등 발자국화석은 6천개를 넘을 정도다.
그러면 한반도에서 이토록 많은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과연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에 공룡들의 천국이었는가. 사실 발견된 발자국화석만을
고려한다면 한반도가 공룡의 천국이라는 말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