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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글 모음

외통 2023. 9. 1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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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글모음

기록순: 무소유/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 무소유의 삶과 침묵/ 날마다 좋은 날/ 깨어 있는 시간/ 경이롭고 새로운 순간/ 작은 선행/ 그냥 걷기만 하세요/ 인생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빛과 거울/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중생/ 있는 그대로가 좋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은 늘 새롭다/ 나무/ 욕망과 필요의 차이/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작은 것에서 얻는 행복/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좋은 친구/ 내 생각이 나의 운명이다/ 부자가 되기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길/ 하나의 씨앗이/ 나 자신이 부끄러울 때/ 빈 마음/ 내가 가진 것/ 버리고 떠나기/ 너그러운 마음으로/ 행복의 비결/ 삶/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월과 인생/ 나무 그늘/ 따뜻한 가슴으로/ 자기 자신답게 살라/ 마음의 주인이 돼라/ 처음 그 마음처럼/ 가을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여백의 아름다움/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번뇌/ 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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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냇물은 흐르고 바위는 서 있다. 꽃은 새소리에 피어나고, 골짜기는 나무꾼의 노래에 메아리친다. 온갖 자연은 이렇듯 스스로 고요한데, 사람의 마음만 공연히 소란스럽구나.˝

˝소창청기(小窓淸記)˝라는 옛 책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자연은 저마다 있을 자리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분수 밖의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고 그들이 몸담아 사는 세상 또한 소란스럽다. 돌이켜보면 행복의 조건은 여기저기 무수히 놓여 있다.

먹고사는 일상적인 일에 매달려 정신을 빼앗기고 지내느라고 참된 자기의 모습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리가 이 풍진 세상을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내 몫의 삶인지를 망각한 채 하루하루를 덧없이 흘려보냈다.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면 이것저것 챙기면서 거두어들이는 일을 우선 멈추어야 한다. 지금 차지하고 있는 것과 지닌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소원했던 친구에게 이 가을날 편지를 쓴다든지 전화를 걸어 정다운 목소리로 안부를 묻는 일은 돈 드는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만 따지려는 각박한 세태이기 때문에, 돈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일이 행복해지는 비결이다.

가을밤이면 별빛이 영롱하다. 도시에서는 별 볼 일이 없을 테니 방안에 별빛을 초대하면 어떨까 싶다.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아무나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주거공간에서 혼자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이라면, 시끄러운 텔레비전 스위치를 잠시 끄고 전등불도 좀 쉬게 하고, 안전한 장소에 촛불이나 등잔불을 켜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한때나마 촛불이나 등잔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그윽해질 것이다.

/법정 스님 무소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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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

내게 가장 따뜻한 친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지금의 당신과 나의 인연이 그런 인연이기를.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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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의 삶과 침묵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우리가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늘 갈등상태에서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내가 사는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전체의 한 부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사는 개개인이 구체적인 사회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던?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켜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서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이 한때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 두지 않던 인간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맞았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직위나 돈이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나 자신이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가? 의미 없는 말을 하루 동안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서 얘기할 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하여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역사상 사람답게 살아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그 내부는 비어있다.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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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좋은 날

산다는 것은 비슷비슷한 되풀이만 같다. 하루 세끼 먹는 일과 자고 일어나는 동작, 출퇴근의 규칙적인 시간관념 속에서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온다.

때로는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면서, 또는 후회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노상 그날이 그날 같은 타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간다.

이와 같은 반복만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는 나머지 허락받은 세월을 반납하고서라도 도중에서 뛰어내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안으로 유심히 살펴보면 결코 그날이 그 날일 수 없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또한,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다행히도 그 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는 가구가 아니며, 앉은자리에서만 맴돌도록 만들어진 시곗바늘도 아니다.

끝없이 변화하면서 생성되는 것이 생명현상이므로 개인의 의지를 담은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법정 스님 서 있는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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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줄이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시간의 나머지는 아무도 모른다. ´ 쇠털같이 많은 날 ´ 어쩌고 하는 것은 귀중한 시간에 대한 모독이요, 망언이다.

시간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 한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잠자는 시간은 휴식이요. 망각이지만 그 한도를 넘으면 죽어있는 시간이다.

깨어 있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은 그의 인생이 그만큼 많은 삶을 누릴 수 있다

자다가 깨면 다시 잠들려고 하지 말라. 깨어 있는 그 상태를 즐기라. 더 값있는 시간을 활용하라.

/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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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롭고 새로운 순간

날마다 새롭습니다. 우리의 나날은 늘 새로운 것입니다.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고 똑같은 날은 하나도 없습니다.

괴로워도 다른 괴로움이고 즐거워도 다른 즐거움이지 똑같은 괴로움 똑같은 즐거움이란 있을 수 없지요.

어제와 똑같은 호흡을 어찌 오늘도 들이고 내쉴 수 있겠어요.

같은 강물에서는 절대 두 번 목욕할 수 없다고 하듯 우리의 순간순간은 새롭고 경이로운 것입니다.

세상을 살며 어느 한순간이라도 똑같은 순간을 경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늘 같이 보려고 하고 똑같이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어제의 생각으로 오늘을 바라보며, 이전의 관념으로 지금을 판단하려 하고, 어제 만난 사람으로 오늘의 사람을 대하고, 이전의 사랑으로 지금의 사랑을 끼워 맞추려 하거든요.

이전에 들었던 가르침으로 오늘 듣고 있는 가르침을 가로막지 마세요.

어제 들었던 가르침을 다 놓아 버릴 수 있어야! 오늘 전혀 새롭고 신비로운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 아는 가르침이라고, 이미 경험했다고 전에 느껴보았노라고 하지 마세요.

지금 느끼는 경험은, 지금 듣고 있는 가르침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느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전혀 새로운 것이니까요.

/법정 스님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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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선행

작은 선(善)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 가지씩 행해야 한다.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남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 일상적인 행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거듭거듭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늘 넘어진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행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 경전을 많이 봤다고 해서, 법문을 많이 들었다고 해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루 동안에 한 가지 착한 일을 듣거나 행할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것이다.

참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는가, 하루 한 가지라도 이웃에게 득이 되는 행동했는가 안 했는가에 의해서 그날 하루를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된다.

/법정 스님《산에는 꽃이 피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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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걷기만 하세요

한 걸음, 한 걸음 삶을 내딛습니다. 발걸음을 떼어놓고 또 걷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만 짊어지고 온 발자국은 없습니다.

그냥, 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 우리 삶이고 세월입니다.

한 발자국 걷고 걸어온 그 발자국 짊어지고 가지 않듯, 우리 삶도 내디디고 나면 뒷발 자국 가져오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냥 그냥 살아갈 뿐, 짊어지고 가지는 말았으면 하고 말입니다. 다 짊어지고 그 복잡한 짐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냥 놓고 가는 것이 백번 천번 편한 일입니다.

밀물이 들어오고 다시 밀려 나가고 나면 자취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애써 잡으려 하지 마세요. 없어져도 지금 가고 있는 순간의 발자국은 여전히 그대로일 겁니다.

앞으로 새겨질 발자국, 삶의 자취도 마음 쓰지 말고 가세요.

발길 닿는 대로 그냥 가는 겁니다. 우린 지금, 이 순간 그냥 걷기만 하면 됩니다.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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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우리 앞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각자 삶의 양식에 따라서 오르막길을 오르는 사람도 있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 길은 인간의 길이고 꼭대기에 이르는 길이다.

내리막길은 쉽고 편리하지만, 그 길은 짐승의 길이고 구렁으로 떨어지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평탄한 길만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십 년 이십 년 한 생애를 늘 평탄한 길만 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 생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그것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르막길을 통해 뭔가 뻐근한 삶의 저항 같은 것도 느끼고, 창조의 의욕도 생겨나고, 새로운 삶의 의지도 지닐 수 있다.

오르막길을 통해 우리는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거듭 태어날 수 없다.

/법정 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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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거울

오후의 입선(入禪) 시간, 선실(禪室)에서 졸다가 대숲에 푸슬푸슬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듣고 혼침(昏沈)에서 깨어났다.

점심 공양 뒤 등 너머에서 땔나무를 한 짐 지고 왔더니 고단했던 모양이다.

입춘이 지나간 지 언제인데 아직도 바람 끝은 차고 산골에는 이따금 눈발이 흩날린다.

아까 산길에서 비전(碑殿)에 사시는 성공(性空) 스님을 만났다.

80 이 가까운 노스님이 지게에 한 짐 가득 땔감을 지고 가시는 걸 보고,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온유한 수행자의 모습에 숙연해졌다.

요즘은 밥 짓는 공양주가 한 사람 들어와 다행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스님들 두 분이 손수 끓여 자시면서 지냈다.

정진 시간이 되면 거르지 않고 염불 소리가 뒷골에까지 메아리친다. 비전은 염불당(念佛堂)이기 때문이다.

성공 노스님은 한때 학인(學人)들에게 경전 과목을 가르치는 강사(講師)로도 지낸 바 있지만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젊은 스님들한테도 또박또박 존댓말을 쓰면서 겸손을 지킨다. 이 땅에서 80년 가까이 살면서도 아직 서울에 가보지 않았다는 흙냄새 풍기는 인자하신 스님. 지난해 봄에는 상좌의 주선으로 제주도를 다녀오셨는데, 어린애처럼 마냥 좋다고 하시면서 한라산을 오를 때는 그 걸음걸이가 젊은 상좌보다 앞서 펄펄 달리더란다.

큰절 임경당(臨鏡堂)에는 올해 여든다섯 살이 되는 취봉(翠峰) 노스님이 계신다. 젊어서는 일본에 건너가 종립 대학에서 수학도 했고, 몇 차례 주지직도 맡아 지낸 노스님인데, 근면과 단순과 청빈으로 후학들에게 몸소 모범을 보이는 대덕(大德)이시다. 스님은 사중(寺中) 물건과 개인의 소유에 대한 한계를 누구보다도 투철하게 몸에 익히고 있다.

한번은 감기·몸살로 앓아누워 계실 때, 약을 달이느라 시중들던 스님이 생강을 한 뿌리 후원 원주 실에서 가져다 썼다. 그걸 아시고 단박에 사다 갚으라고 하실 만큼, 공사(公私)의 개념이 분명하시다. 주지로 계실 때에 사중 볼일로 출장 때 사무실에서 주는 여비를 쓰고 나머지는 단돈 10원이 될지라도 반드시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요즘 사중 소임 보는 사람들 대부분은, 공중 물건을 가지고 마치 자기 개인 것이나 되는 듯이 함부로 사용하는 폐습이 있는데, 노스님의 그 같은 모범은 커다란 교훈이 아닐 수 없다. 90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법당의 조석예불과 대중공양에 거르는 일이 결코 없다. 걸핏하면 예불을 거르고 후원에서 따로 상을 차려 먹기를 좋아하는 덜된 중들에게는 마땅히 배우고 따라야 할 승가의 청정한 생활 규범이다.

이런 노스님들이 계시는 산중에서 함께 사는 것을 나는 참으로 고맙고 다행하게 생각한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생활 규범에 따라 둘레에 한없는 빛과 거울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한결같은 겸손과 단순한 청빈으로 그들 자신을 구원하고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노스님들은 참선이 어떻고 화두(話頭)가 어떻고 견성(見性)이 뭐라고 말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저 묵묵히 몸소 행동으로 보일 뿐이다. 대개 뭘 알았다고 자기 과시에 열을 올리는 스님들한테서는 수행자의 덕성인 그 겸손과 단순과 청빈과 온유함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슬이 푸른 오만과 독선과 아집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진해서 자리를 같이하게 되면 마음이 편치 않고 피곤하다.

선가(禪家)에 한고추(閑古錐)란 용어가 있는데, 닳아져서 무딘 송곳을 가리킨 말이다. 수행자의 경지가 원숙해져서 서슬이 밖에 드러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니 서슬이 푸른 것은 미숙함을 드러낸 것.

알면서도 그 앎에 걸려 있지 않은 성숙한 지혜가 귀하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도로써 자만한다면 그는 결코 선지식(善知識)일 수 없다. 관념의 찌꺼기인 상(相)이 있으면 진짜 수행자가 아니라고 대승(大乘) 경전에서는 입이 닳도록 말하고 있지 않던가. 수행자에게 중요한 것은 학식이나 지식이 아니라 지혜롭고 자비스러운 행동이다. 종교란 회색의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자만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덕성을 길러준다. 투철한 안목과 번뜩이는 기량으로써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명안종사(明眼宗師)의 기능도 필요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이름 없는 노스님처럼 수행자로서 한결같이 정직하고 겸허하고 꿋꿋하게 살아감으로써 후학들에게 끼치는 덕 화는, 더욱더 소중하다.

사람을 본질에서 감화시키는 것은 그럴듯한 말에 있지 않고 몸소 움직여 보이는 행동에 있다. 좋은 말을 한다는 것과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 사람의 행위가 그 사람의 지식보다 뛰어날 때 그 지식은 유익하다. 그러나 그 지식이 그 사람의 행위보다 크게 드러날 때 그 지식은 무익한 것이다.

진짜 수행자는 그 어떤 종파를 막론하고 앞뒤가 탁 트인 단순성(單純性)에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이, 생각만 해도 숙연해지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그가 크리스마스 전 단식 기간을 어떤 은둔처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다. 지나친 고행으로 만년의 그는 여러 가지 병고를 치른다. 올리브기름이 건강에 해로워 돼지기름으로 요리한 음식을 조금 먹었다. 단식이 끝날 무렵 대중 앞에서 설교했는데 그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나를 성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헌신적인 사랑으로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단식 기간에 돼지기름으로 만든 음식을 먹었음을 여러분 앞에 고백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알려진 사실을 이웃들에게 감추고 싶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영성(靈性)에 자만심이나 번뇌의 유혹이 있을 때는 즉시 그의 형제들에게 감추는 일 없이 그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자기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머무는 은둔처나 어떤 곳에서라도 모든 사람이 나를 지켜볼 수 있도록 나는 살고 싶소. 그들이 나를 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성스러운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나는 위선자가 될 것이오.˝

수행자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겉 다르고 속 다른 위선을 그는 단호히 배격한 것이다. 세상에 빛과 거울이 될 이런 분들을 스승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이요 커다란 위로다. 이런 분들의 덕화가 미치고 있는 한 그 어떤 세상에서라도 인간은 절망하거나 멸하지 않을 것이다.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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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 또는 며칠 전의 늙은 자로써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된 것이기 일쑤이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트게 된다.

/법정 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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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보살은 중생으로 말미암아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말미암아 보리심을 내고 보리심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이룬다.

드넓은 광야에 서 있는 큰 나무의 뿌리가 수분을 받으면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무성하듯이 생사 광야의 보리수도 그와 같다.

모든 중생은 뿌리가 되고 부처님이나 보살은 꽃과 열매가 된다.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지혜의 꽃과 열매를 맺는다.

보살이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하면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므로 보리는 중생에게 딸린 것이다. 중생이 없다면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다.

/법정 스님 말의 침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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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가 좋다

풀과 나무들은 저마다 자기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그 누구도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풀이 지닌 특성과 그 나무가 지닌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눈부신 조화를 이루고 있다.

풀과 나무들은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생명의 신비를 꽃피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들의 분수에 맞도록 열어 보인다.

옛 스승(임제선사)은 말한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서 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되고,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파면된다. 남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이런 도리를 이 봄철에 꽃에서 배우라.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서 옛 스승은 다시 말한다. “일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이다. 다만 억지로 꾸미지 말라. 있는 그대로가 좋다.”

여기에서 말한 ‘일없는 사람’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이 아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그 일에 빠져들지 않는 사람, 일에 눈멀지 않고 그 일을 통해서 자유로워진 사람을 가리킨다.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라. 아름다움이란 꾸며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모습 그대로가 그만이 지닌 그 특성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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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라고 순간순간 자각하라.

한눈팔지 말고, 딴생각하지 말고, 남의 말에 속지 말고 스스로 살펴라. 이처럼 하는 내 말에도 얽매이지 말고 그대의 길을 가라.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이런 순간들이 쌓여 한 생애를 이룬다.

너무 긴장하지 말라. 너무 긴장하면 탄력을 잃게 되고 한결같이 꾸준히 나아가기도 어렵다. 사는 일이 즐거워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라. 묵은 수렁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라.

/법정 스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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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은 늘 새롭다

물에는 고정된 모습이 없다.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근 모습을 하고 모난 그릇에 담기면 모난 모습을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뜨거운 곳에서는 증기로 되고 차가운 것에서는 얼음이 된다. 이렇듯 물에는 자기 고집이 없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남의 뜻에 따른다. 살아 있는 물은 멈추지 않고 늘 흐른다. 강물은 항상 그곳에서 그렇게 흐른다. 같은 물이면서도 늘 새롭다.

오늘 흐르는 강물은 같은 강물이지만 어제의 강물은 아니다. 강물은 이렇듯 늘 새롭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거죽은 비슷하지만 실제는 아니다. 오늘의 나는 새로운 나다. 살아 있는 것은 이처럼 늘 새롭다.

/법정 스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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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나무처럼 아무 욕심 없이 묵묵히 서서, 새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고 열매를 맺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훨훨 벗어버리고 빈 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

새들이 날아와 팔이나 품에 안기어도 그저 무심할 수 있고, 폭풍우가 휘몰아쳐 가지 하나쯤 꺾이어도 끄떡없는 요지부동. 곁에서 꽃을 피우는 화목이 있어. 나비와 벌들이 찾아가는 것을 볼지라도 시샘할 줄 모르는 의연하고 담담한 나무.

한여름이면 발치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쉬어가게 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음덕을 지닌 나무.

/법정 중에서 텅 빈 충만 중 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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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필요의 차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모른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공통된 병이다. 그래서 늘 목이 마른 상태이다.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초라하고 궁핍하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을 잊어버렸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 있다.

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서도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이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욕망은 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애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 법정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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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가는 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그것은 우주의 맥박이고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이고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갈 곳이 어디인가를 소리 없는 소리로 깨우쳐줄 것이다.

이끼 낀 기와지붕 위로 열린 푸른 하늘도 한 번쯤 쳐다봐라. 산마루에 걸린 구름, 숲속에 서린 안개에 눈을 줘보라. 그리고 시냇가에 가서 맑게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가보라.

차고 부드러운 그 흐름을 통해 더덕더덕 끼어 있는 먼지와 번뇌와 망상도 함께 말끔히 씻겨질 것이다.

/법정 스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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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모든 것은

우주에 살아 있는 모든 그것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이고 흐르면서 변화한다.

한곳에 정지된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해와 달이 그렇고 별자리도 늘 변한다.

우리가 기대고 있는 이 지구도 우주 공간에서 늘 살아 움직이고 있다.

무상하다는 말은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우주의 실상이다.

변화의 과정에 생명이 깃들고, 변화의 과정을 통해 우주의 신비와 삶의 묘미가 전개된다.

만일 변함이 없이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숨이 멎은 죽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끝없이 변하면서 거듭거듭 형성되어 간다.

봄이 가고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그와 같이 순환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우주의 호흡이며 율동이다.

그러므로 지나가는 세월을 아쉬워할 게 아니라, 오는 세월을 잘 쓸 줄 아는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법정 스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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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에서 얻는 행복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려면 될 수 있는 한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큰 것과 많은 것에는 살뜰한 정이 가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 크고 많은 것을 추구하다 보니 무너져서 작고 적은 것에 고마워할 줄을 모르게 되었다.

내가 가끔 시내에 나오면 편지가 와 있다. 편지는 많이 받지만, 답장을 자주 쓰지는 못한다.

지난겨울 어느 날 밖에는 눈이 오고, 뒷골에선 노루 울음소리 들려, 내 마음도 소년처럼 약간 부풀어 올랐다.

그래서 묵은 편지를 뒤적인다. 답장을 몇 군데 써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일어 벼루에 먹을 갈았다.

마땅한 종이가 없어 뒤적이다가 도배하고 남은 종이 사이에서 화선지 두 장을 발견했다. 그것도 전지가 아니고 쪼가리였다. 그걸 오려서 편지를 몇 통 썼는데, 종이가 한정되어 있어서 아주 조심스럽게 아껴 써야 했다. 자연히 종이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보통 때는 글씨도 크게 써서 끝내곤 했는데 그날은 아주 잔글씨로 써서 몇 군데 띄워 보냈다. 그때 적은 것이 참 살뜰하고 고맙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갔다가 지물포에서 화선지를 스무 장 남짓 사서 왔다. 그랬더니 쪼가리 두 장 가졌을 때의 오붓하고 살뜰하고 고맙던 정이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것은 그런 것이다.

/법정 스님 작은 것에서 얻는 행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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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갖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 두지 않던 인간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사기를 당했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지?´ 하고 자기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자신이 지닌 직위나 돈,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법정 스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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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성(혹은 영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그 힘(생명력)을 제대로 쓸 줄을 알아야 한다.

그 힘을 바람직한 쪽으로 잘 쓰면 얼마든지 창조하고 형성하고 향상하면서 삶의 질을 거듭거듭 높여갈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은 생명력을 가지고도 한 생각 비뚤어져 잘못 써 버릇하면, 그것이 업력(業力)이 되어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이 끝없는 구렁으로 떨어져 버린다.

똑같은 생명력이라도 서로 다른 지배를 받아 한 장미에서 한 갈래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다른 갈래는 독이 밴 가시로 돋아난다.

도덕성이 모자랐거나 삶의 목적이 합당치 못한 일은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늘어놓는다고 할지라도 올바른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사람은 하나하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가 의식을 하건 안 하건 둘레의 대기에 파장을 일으켜 영향을 끼치고, 착하지 못한 말과 행동은 또한 착하지 못한 파장으로 어두운 영향을 끼친다.

사람은 겉으로는 강한 체하지만 속으로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다. 우리 자신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또한 다른 사람의 상처를 건드려 고통을 주는 일이 적지 않다.

우리는 순간순간 내게 주어진 그 생명력을 값있게 쓰고 있는지를, 아니면 부질없이 탕진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볼 줄을 알아야 한다.

삶의 양을 따지려면 밤낮없이 채우는 일에만 채우는 일에 급급하겠지만, 삶의 질을 생각한다면 비우는 일에 더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다.

깊어 가는 가을밤 풀벌레 소리에 귀를 모으면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 본 것이다.

오로지 인간이 되기 위해서.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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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친구

친구 사이의 만남에는 서로의 메아리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자주 만나게 되면 상호 간의 그 무게를 축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친구일 것이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 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 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시구가 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런 경험은 없는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앉은 애호박을 보았을 때 친구한테 따서 보내주고 싶은 그런 생각 말이다.

혹은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 있는 들꽃과 마주쳤을 때 그 아름다움의 설렘을 친구에게 전해 주고 싶은 그런 경험은 없는가?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은 친구일 것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친구를 통해서 삶의 바탕을 가꾸라.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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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이 나의 운명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함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 있는 생물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제 생각이 곧 자신의 운명임을 기억하라. 우주의 법칙은 자력과 같아서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 밝은 삶과 어두운 삶은 자신의 마음이 밝은가 어두운가에 달려 있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사람은 저마다 홀로 자기 세계를 가꾸면서 공유하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한 가락에 떨면서도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거문고 줄처럼´ 그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문고 줄은 서로 떨어져 있으므로 울리는 것이지 함께 붙어 있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 공유하는 영역이 너무 넓으면 다시 범 속에 떨어진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며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을 시간을 우선 받아서 쓰고 있다.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연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만큼 고이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 없이 쏟아 버린다. 그 물이 아래 연잎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또 일렁이다가 도르르 연못으로 비워 버린다.

이런 광경을 무심히 지켜보면서,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리는구나!´ 하고 그 지혜에 감탄했었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꺾이고 말 것이다. 세상 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을 안 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 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여물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걸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법정 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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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기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길

세월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가고 오고 변하는 것일 뿐이다.

세월이 덧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덧없는 것이다.

해가 바뀌면 어린 사람은 한 살 더해지지만 나이 든 사람은 한 살 줄어든다.

되찾을 수 없는 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잘 살아야 한다.

인간의 탐욕에는 끝이 없어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른다. 가진 그것만큼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가난은 결코 미덕이 아니며 ´맑은 가난´을 내세우는 것은 탐욕을 멀리하기 위해서다.

가진 것이 적든 많든 덕을 닦으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 가능하다면 잘살아야 한다.

돈은 혼자 오지 않고 어두운 그림자를 데려오니 재산은 인연으로 맡은 것이니 내 것도 아니므로 고루 나눠 가져야 한다.

우리 모두 부자가 되기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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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씨앗이

당신의 마음에 어떤 믿음이 움터 나면 그것을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히 간직해 두고 하나의 씨앗이 되게 하라.

그 씨앗이 당신 마음의 토양에서 싹트게 하여 마침내 커다란 나무로 자라도록 기도하라. 묵묵히 기도하라. 사람은 누구나 신령스러운 영혼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거칠고 험난한 세상에서 살지라도 맑고 환한 그 영성에 귀 기울일 줄 안다면 그릇된 길에 엇눈 팔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소중하고 귀한 것일지라도 입 벌려 쏟아 버리고 나면 빈 들녘처럼 허해질 뿐이다.

어떤 생각을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히 간직해 두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싹이 트고 잎이 펼쳐지다가 마침내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앗은 쭉정이로 그칠 뿐, 하나의 씨앗이 열매를 이룰 때 그 씨앗은 세월을 뛰어넘어 새로운 씨앗으로 거듭난다.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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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부끄러울 때

나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 앞에 섰을 때는 결코 아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어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이다. 그때 나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가난하게 되돌아 보인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 앞에 섰을 때 나는 기가 죽지 않는다. 내가기가 죽을 때는 나 자신이 가난함을 느낄 때는 나보다 훨씬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여전히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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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마음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웠더니 심지를 줄여도 자꾸만 불꽃이 올라와 펄럭거린다.

가득 찬 것은 덜 찬 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눈앞에서 배우고 있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차다.

/법정 스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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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것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요.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법정 스님 무소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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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떠나기

살아있는 영혼끼리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함으로써 서로가 생명의 환희를 누리는 일을 만남이라고 한다면, 생명의 환희가 따르지 않는 접촉은 마주침이지 만남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 한 시인의 표현처럼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라는 그런 사람이다. 곁에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그리움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그런 사람과는 때때로 만나야 한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으면 삶에 그늘이 진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지극히 사무적인 마주침이거나 일상적인 스치고 지나감이다.

마주침과 스치고 지나감에는 영혼의 메아리가 없다. 영혼의 메아리가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법정 스님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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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운 마음으로

하찮은 것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생각을 먼저하고 행동을 나중에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언제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어렵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만 친절하고 즐겁고 동정적이고 관심을 두고 이해하는 삶을 살도록 하세요.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무슨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람들을 나무라지 마세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고 금방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래봐야 오늘 하루뿐인걸요.

누가 알아요. 그러다가 아주 좋은 날이 될지.

되도록 약속하지 말되, 일단 약속을 했다면 성실하게 지키세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말이죠.

당신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당신이 그들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믿게 하세요.

즐거워하세요. 당신이 하찮은 일로 아파하고 실망함으로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울해지지 않도록 하세요.

이 세상에 마음의 짐을 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기분을 존중하세요. 최선을 다하고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얻어지는 성공이 더욱 달콤한 법이죠.

지금보다 행복한 순간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쓸모없는 날은 웃지 않는 날입니다.

믿음의 양에 따라 그만큼 젊어지고, 의심의 양에 따라 그만큼 늙어 갑니다.

자신감의 양에 따라 그만큼 젊어지고, 두려움의 양에 따라 그만큼 늙어 갑니다.

희망의 양에 따라 그만큼 젊어지고 낙망의 양에 따라 그만큼 늙어 갑니다.

항상 새롭게, 항상 즐겁게,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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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비결

세상과 타협하는 일보다 더 경계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다.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해야 한다.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나머지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 간 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다 풍요로워진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애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물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우주의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우리가 일단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고 한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

/법정 스님 잠언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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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 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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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서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이 한때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 두지 않던 인간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법정 스님 무소유의 삶과 침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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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 인생

세월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가고 오고 변하는 것일 뿐이다.

세월이 덧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덧없는 것이다.

해가 바뀌면 어린 사람은 한 살 더해지지만 나이 든 사람은 한 살 줄어든다.

되찾을 수 없는 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잘 살아야 한다.

인간의 탐욕에는 끝이 없어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른다.

행복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가진 그것만큼 행복한 것이 아니다.

가난은 결코 미덕이 아니며 ´맑은 가난´을 내세우는 것은 탐욕을 멀리하기 위해서다.

가진 것이 적든 많든 덕을 닦으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 가능하다면 잘살아야 한다.

돈은 혼자 오지 않고 어두운 그림자를 데려오니 재산은 인연으로 맡은 것이니 내 것도 아니므로 고루 나눠 가져야 한다.

우리 모두 부자가 되기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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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늘

나무 그늘에 앉아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속 뜰에서는 맑은 수액이 흐르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다.

혼자서 묵묵히 숲을 내다보고 있을 때 나 자신도 한 그루 정정한 나무가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으면, 그저 넉넉하고 충만할 뿐 전혀 무료하지 않다. 이런 시간에 나는 무엇엔 가 그지없이 감사드리고 싶어진다.

하루 스물네 시간 중에서 맑고 잔잔한 이런 여백이 없다면 내 삶은 탄력을 잃고 이내 시들해지고 말 것이다.

올해도 모란은 흐드러지게 피었다. 겨울 날씨가 춥지 않아서였던지 예년보다 한 열흘 앞당겨 피어났다. 모란밭 곁에서 같은 무렵에 피어난 노란 유채꽃이 모란의 자주색과 잘 어울렸다. 꽃의 빛깔과 모양이 같아서 유채꽃이라 했지만 사실은 갓꽃이다. 지난해 겨울 김장을 하고 남겨둔 것인데 봄이 되니 화사한 꽃을 피운 것이다.

철새로는 찌르레기가 맨 먼저 찾아왔다. 달력을 보니 4월 9일, 쇳소리의 그 목청으로 온 골짝을 울리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아주 반가웠다.

모란이 피기 시작한 날 밤에 소쩍새도 함께 목청을 열었다. 4월 16일로 적혀있다.

잇따라 쏙독새, 일명 머슴 새도 왔다. 머지않아 꾀꼬리와 뻐꾸기도 찾아올 것이다. 이렇게 철새들이 찾아와 첫인사를 전해올 때,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내 마음은 설렌다.

새의 노래는 (울음이 아니다) 잠든 우리 혼을 불러일으켜 준다.

굳어지려는 가슴에 물기를 보태 준다.

/법정 스님 봄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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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가슴으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이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공간적으로는 얼마쯤의 거리를 두고 산다고 할지라도 시간상으로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인연의 줄에 우리는 서로 이어져 있다. 우리가 세상에 있다는 것은 함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요즘 내 오두막 둘레에는 모란이 한창이다. 산 아래에서는 영랑(永朗)의 표현대로,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는데, 해발 8백 고지나 되는 이곳은 6월에 들어서야 모란이 문을 연다.

《변화 갈망하는 사회》

며칠 전 비바람에 꺾인 한 가지를 주워다가 남색 유리병에 꽂아 식탁 위에 놓아두었더니 그 빛깔의 조화가 볼 만하다.

자줏빛 꽃잎과 그 안에 보석처럼 돋아난 노란 꽃술, 초록빛 잎사귀에 남색 유리병이 한데 어울려 찬란한 빛깔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식탁의 차림새는 지극히 간소하지만, 한가지 꽃으로 인해 어떤 제왕의 수라상보다도 호사스럽게 여겨진다.

우리처럼 외떨어져 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단출하게 사는 괴짜들은, 음식물만 가지고 배를 채우지 않는다.

자연이 내려준 한 송이 꽃이나 맑은 물, 따뜻하고 투명한 햇살과 산들거리는 바람결 속에 스며 있는 우주의 살아있는 기운을 평온한 마음으로 감사히 받아들이면, 그게 살이 되고 피가 되어 건강을 이룬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커다란 생명체인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작은 생명체인 내가 받아들이면서 그 질서와 조화를 함께 이루어나갈 때 안팎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소리다.

이게 어디 사람만의 건강이겠는가. 우리가 몸담아 사는 세상의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온갖 부정과 비리로 인해 끝도 없이 휘청거리고 있는 것도, 생명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우주적인 그 질서와 조화를 우리 스스로 깨뜨려 놓았기 때문이다.

사회나 세상은 개체의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다. 존재하는 것은 각자의 개인이지 사회가 아니다.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여러 모양의 복합체. 당신과 나 개개인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다. 그런데 추상적인 그 사회가 개인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람이 세상을 만들어 가는 한편 세상이 또한 사람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 들어 우리가 모두 정치권과 특정 기업의 검은 유착으로 인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보고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상관관계에서다.

우리가 기대했던 문민정부, 그러나 부정과 비리로 인해 「부패 공화국」으로 전락하여 민주공화국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는 요즘,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어떤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국가의 발전도 개인의 인간성장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변화되려면 우리 각자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개개인의 의식이 달라지고 생활 습관이나 그 자세가 달라져야 한다. 우리 둘레에 물질의 더미는 한없이 쌓여가지만, 그런 것들을 사용하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지난날 우리가 어렵게 살던 시절, 연탄 몇 장과 쌀 몇 되를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행복해하던 그런 풋풋한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이제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거나 만족할 줄을 모른다.

겉으로는 번쩍거리면서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전에 없이 초라하고 궁핍하다. 그저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참으로 걱정해야 할 것》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는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상적인 체험으로 알고 있다.

향기로운 한잔의 차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친구와 나눈 따뜻한 말씨와 정다운 미소를 가지고도 그날 하루 마음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차지하고 살면서도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따뜻하고 살뜰한 정을 잃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입만 벌렸다 하면 누구나 불황을 말하고 경제를 걱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인간존재 그 자체다.

사람이 사람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인간이 될 수 없다. 행복해질 수 있는 소재는 여기저기에 무수히 널려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가슴을 우리는 잃어 가고 있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들어 있다. 따뜻한 가슴으로 우리 시대의 얼룩을 지워나갔으면 좋겠다.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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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답게 살라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미리 돈을 받아서 쓰고 있다.

과거나 미래 쪽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해 버린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의 두려움도 발붙일 수 없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법정 스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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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주인이 돼라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드는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화를 내고 속상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외부의 자극에서라기보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데에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정말 우리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 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러한 마음을 돌이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법정 스님 무소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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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 마음처럼

우리가 무언가에 싫증을 낸다는 것은 만족을 못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처음 가졌던 나름대로 소중한 느낌들을 쉽게 잊어가기 때문이죠.

내가 왜 이 물건을 사게 됐던가? 내가 왜 이 사람을 만나게 됐던가? 내가 왜 그런 다짐을 했던가?

하나둘 곱씹어 생각하다 보면 그 처음의 좋은 느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은 변화합니다. 늘 같을 순 없죠.

악기와도 같아요. 그 변화의 현 위에서 각자의 상념을 연주할지라도 현을 이루는 악기 자체에 소홀하면 좋은 곡을 연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변화를 꿈꾸지만, 사소한 무관심,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이따금 불협화음을 연주하게 되지요.

현인들은 말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언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까이 있다.˝

그런 것 같아요. 행복은 결코 누군가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지금. 눈을 새롭게 뜨고 주위를 바라보세요. 늘 사용하는 구형 휴대전화기, 어느새 손에 익은 볼펜 한 자루, 잠들어 있는 가족들 그리고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 사랑했던 사람, 지금 사랑하는 사람.

먼저 소중한 느낌이 들려 해 보세요. 먼저 그 마음을 되살리고 주위를 돌아보세요. 당신은 소중한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속상해하지 마세요.

우리가 소중하게 떠올렸던 그 마음. 그들로 인해 잠시나마 가졌던 그 마음. 볼펜을 종이에 긁적이며 고르던 그 마음. 처음 휴대전화기를 들고 만지작거리던 그 마음.

그 마음을 가졌었던 때를 떠올리며 엷은 미소를 짓는 자신을 찾을 줄 아는 멋진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선물해요.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들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해요.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먼저 선물해요.

오늘 옷 참 잘 어울려요.

먼저 웃으며 인사해요.

안녕. 너 참 예쁘다고.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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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야기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 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 하에서 주소록을 펼쳐 들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알아차린다.

이 시대 이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연줄로 맺어져 서로가 믿고 기대면서 살아가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낮 동안은 바다 위의 섬처럼 저마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던 우리가 귀소의 시각에는 같은 대지에 뿌리박힌 존재임을 비로소 알아차린다.

상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볼 때 우리들의 현실은 과거처럼 보인다.

이삭이 여문 논밭은 황홀한 모자이크. 젖줄 같은 강물이 유연한 가락처럼 굽이굽이 흐른다.

구름이 헐벗은 산자락을 안쓰러운 듯 쓰다듬고 있다. 시골마다 도시마다 크고 작은 길로 이어져 있다.

아득한 태곳적 우리 조상들이 첫걸음을 내디디던 바로 그 길을 후손들이 휘적휘적 걸어간다.

그 길을 거쳐 낯선 고장의 소식을 알아 오고, 그 길목에서 이웃 마을 처녀와 총각은 눈이 맞는다.

꽃을 한 아름 안고 정다운 벗을 찾아가는 것도 그 길이다. 길은 이렇듯 사람과 사람을 맺어준 탯줄이다.

그 길이 물고 뜯는 싸움의 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람끼리 흘기고 미워하는 증오의 길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

뜻이 나와는 같지 않대서 짐승처럼 주리를 트는 그런 길이라고는 차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미워하고 싸우기 위해 마주친 원수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 사랑하려고 아득한 옛적부터 찾아서 만난 이웃들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 듯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생자필멸, 회자정리, 그런 것인 줄은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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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나 자신이며 가장 나쁜 벗도 나 자신이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도 나 자신 속에 있으며 나를 해치는 가장 무서운 칼도 나 자신 속에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자신 중 어느 것을 쫓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은 결정된다.

나 자신만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재산이 많이 있는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

/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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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아름다움

전통적인 우리네 옛 서화에서는 흔히 ˝여백의 미˝를 들고 있다. 이 여백의 미는 비록 서화에서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끼리 어울리는 인간관계에도 해당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가득 채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백의 미가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두루 헤아려 보라. 좀 모자라고 아쉬운 이런 여백이 있어서 우리 삶에 숨통이 트일 수 있지 않겠는가.

친구를 만나더라도 종일 치대고 나면, 만남의 신선한 기분은 어디론지 새어나가고 서로에게 피곤과 시들함만 남게 될 것이다.

전화를 붙들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우정의 밀도가 소멸한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바쁜 상대방을 붙들고 미주알고주알 아까운 시간과 기운을 부질없이 탕진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피해를 주게 되고 자신의 삶을 무가치하게 낭비하고 있다.

바람직한 인간관계에는 그립고 아쉬움이 받쳐 주어야 한다. 덜 채워진 그 여백으로 인해 더욱 살뜰해질 수 있고, 그 관계는 항상 생동감이 감돌아 오랜 세월을 두고 지속될 수 있다.

/법정 스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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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 아닌 새날이다. 겉으로 보면 같은 달력에 박힌 비슷비슷한 날처럼 보이지만 어제는 이미 가 버린 과거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 있음이다.

어제나 내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다.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남을 뜻한다.

이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나태와 노쇠와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다.

새로운 탄생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먼저 어제까지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존에 관념에 갇히면 창조력을 잃고 일상적인 생활 습관에 타성적으로 떠밀려가게 된다.

우리가 살아온 그 많은 날이 빛을 발하지 못한 채, 있어도 그만인 그저 그런 날로 사라지고 만 것도 이 기존의 관념에 갇혀서 맹목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아차릴 때 죽음은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는 죽음 없이는 살 수 없다. 오늘이 어제의 연속이 아니라 새날이요 새 아침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법정 스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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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보고 싶은 만큼 나도 그러하다네.
하지만 두 눈으로 보는 것만이 다는 아니라네.
마음으로 보고 영혼으로 감응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함께일 수 있다네.

결국 있다는 것은 현실의 내 곁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미 한 하늘 아래 저 달빛을 마주 보며
함께 호흡하며 살고 있다네.
마음 안에서는 늘 항상 함께하네.
그리하여 이 밤에도 나는 한사람에게 글을 띄우네.

그리움을 마주 보며 함께 꿈꾸고 있기 때문이라네.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욕심을 가지지 마세.
내 작은 소유욕으로 상대방이 힘들지 않게
그의 마음을 보살펴 주세.

한 사람이 아닌 이 세상을,
이 우주를 끌어안을 수 있는 넉넉함과
큰 믿음을 가지세.
타인에게서 이 세상과 아름다운 우주를 얻으려 마세.

내 안의 두 눈과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내 안의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내 우주를 들여다보세.
그것이 두 눈에 보이는 저 하늘과 같다는 것을.
이 우주와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걸세.

그 안에 내 사랑하는 타인도 이미 존재하고 있음이
더는 가슴 아파할 것 없다네.
내 안에 그가 살고 있음이
내 우주와 그의 우주가 이미 하나이니.
타인은 이제는 타인이 아니라네.

주어도 아낌이 없이 내게 주듯이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한 마음으로,
어차피 어차피… 사랑하는 것조차,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애태우고
타인에게 건네는 정성까지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 아니던가?

결국 내 의지에서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던가?
가지려 하면 더더욱 가질 수 없고,
내 안에서 찾으려 노력하면 갖게 되는 것을,
마음에 새겨 놓게나.
그대에게 관심이 없다 해도,
내 사랑에 아무런 답변이 없다 해도,
내 얼굴을 바라보기도 싫다 해도,
그러다가 나를 잊었다 해도,
차라리 나를 잊은 내 안의 나를 그리워하세.

/법정 스님 누군가 너무나 그리워질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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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찮은 것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생각을 먼저하고 행동을 나중에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언제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어렵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만 친절하고 즐겁고 동정적이고 관심을 두고 이해하는 삶을 살도록 하세요.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무슨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람들을 나무라지 마세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고 금방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래봐야 오늘 하루뿐인걸요.

누가 알아요. 그러다가 아주 좋은 날이 될지 되도록 약속을 하지 말되 일단 약속했다면 성실하게 지키세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말이죠.

당신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당신이 그들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믿게 하세요. 즐거워하세요. 당신이 하찮은 일로 아파하고 실망함으로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울해지지 않도록 하세요.

이 세상에 마음의 짐을 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기분을 존중하세요. 최선을 다하고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얻어지는 성공이 더욱 달콤한 법이죠.

지금보다 행복한 순간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쓸모없는 날은 웃지 않는 날입니다.

믿음의 양에 따라 그만큼 젊어지고 의심의 양에 따라 그만큼 늙어 갑니다.

자신감의 양에 따라 그만큼 젊어지고 두려움의 양에 따라 그만큼 늙어 갑니다.

희망의 양에 따라 그만큼 젊어지고 낙망의 양에 따라 그만큼 늙어 갑니다.

항상 새롭게 항상 즐겁게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 법정 스님 글/편집 김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