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이르기를 “산에 오를 때는 비탈길도 참아내야 하고, 눈길을 갈 때는 위험한 다리도 견디어 내야 한다.”라고 했으니, ′견딜 내(耐)′자 한 글자에는 이렇듯 큰 뜻이 들어 있다. 만일 모진 인정과 험난한 세태에 이 ′견딜 내′자 하나를 가지고 버티어 내지 않는다면 가시덤불과 깊은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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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한 노인이 병이 깊이 들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자 아들을 불렀다. 외아들이었는데 매사에 참을성이 없고 또 성미마저 급하여, 이런 성품을 가지고 장차 자신이 물려줄 많은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 임종을 앞두고도 노인은 오로지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노인은 말했다.
“ 네게 이를 말이 있느니라.”
“ 무엇이오니까?”
“ 나는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나한테는 아들이 너 하나밖에 없으니, 누가 도움을 줄 사람도 없고, 너 혼자 우리 집안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 가르침의 말씀을 주옵소서. 소자 아버님의 말씀을 명심하겠나이다.”
“ 그래서 내가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네가 배움이 모자란 것 같으니 내가 죽거든 재 너머 윤 초시 어른을 찾아가서 내가 보냈다고 말하고 가르침을 받도록 해라.”
“ 그리하겠나이다.”
“ 그냥 가르침의 말씀을 구할 수는 없는 일이니 갈 때는 반드시 쌀을 한 수레 싣고 가거라. 아깝다고 생각 말고.”
“ 명심하겠나이다.”
이윽고 노인이 죽자 젊은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쌀을 한 수레 싣고 재 너머 윤 초시를 찾아갔다. 윤 초시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후부터 젊은이에게 매일 같이 ′참을 인(忍)′ 자 한 글자씩을 쓰게 했다.
마치 하인을 부리듯 허드렛일을 시키며 하루에 공부라고는 ′참을 인′ 자 한 글자씩을 쓰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젊은이는 화도 나고 억울하여 그만 공부를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갈까 하고 생각도 해봤으나, 아버지의 유언도 마음에 걸리고 무엇보다 가지고 간 쌀 한 수레가 아까웠다.
어느덧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스승인 윤 초시가 불렀다.
“ 이제 그만하면 된 것 같으니 돌아가거라. 그리고 이제까지 네가 썼던 ′참을 인′ 자는 가지고 가서 눈에 띄는 곳이면 어디든 붙여 놓도록 해라.”
쌀 한 수레를 싣고 와서 배운 공부가 기껏 아이들 장난 같은 ′참을 인′ 자 글씨 쓰는 연습이라 젊은이는 화가 나고 억울했으나 달리 하소연하기도 싫어서 스승이 시키는 대로 집으로 돌아와 벽이며 기둥이며 천장이며 할 것 없이 ′참을 인′ 자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그로부터 다시 일 년쯤 뒤였다. 며칠 동안 서울에 볼일이 생겨 출타했다가 밤이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왔는데 방에 불이 꺼져 있었고 도란도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내는 혼자가 아니었다. 댓돌에는 웬 못 보던 신발까지 놓여 있었다.
′ 아니, 이것이 간부 놈을 끌어들여?′
거의 눈이 뒤집히다시피 한 젊은이는 헛간으로 가서 도끼를 집어 들고 방으로 향했다.
도끼날이 달빛을 받아 음산히 빛을 뿜었다.
′ 내 이 연놈을 단숨에 요절을 내리라.′
그러나 마루로 올라서는데 눈에 띄는 게 있었다. 기둥에 붙어있는 ′참을 인(忍)′ 자였다.
그동안 수도 없이 떼어서 팽개치고 싶었지만 쌀 한 수레가 너무 아까워서 참고 그대로 놔뒀던 글자였다. 그 순간 아버지와 스승의 얼굴이 떠올랐다. 싣고 갔던 쌀 한 수레도 눈앞에 어른거렸다. 비로소 ′
참을 인(忍)′ 자의 의미가 가슴속으로 아프게 파고들었다. 손에 든 도끼가 스르르 손에서 떨어져 내렸다.
날이 밝았다. 아내가 친정에서 여동생이 왔음을 알렸다. 밤이 늦어 보내지 못하고 함께 데리고 잤던 사람이 다름 아닌 처제였음을 알자 젊은이는 다시 한번 부끄러움으로 몸을 떨었다. 하마터면 살인하고 아내마저 잃는 불운을 ′참을 인′ 자로 하여 막아 낸 것이었다.
/손풍삼 엮음-이야기 채근담 -학이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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