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 추억들 가운데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이 있다.
꽃밭의 북서쪽에 있는 두 채의 측간 가운데 작은 측간 뒤쪽이며 새집 뒤에는 폭이 넓지 않은 대밭을 사이에 두고 할머니의 친정 조카가 방 한 칸과 정지의 작고 허름한 집에서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위로 세 아들과 아래로 두 딸이 있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6·25 때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돌아가시고 그 바람에 홀로된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큰아들 경규 형은 우리 집에서 몇 년간 머슴을 살며 착실하게 새경을 모아 결혼을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인 순창으로 이사를 하였으며 둘째인 재규 형은 군에서 제대한 후 돌아오지 않고 서울에 눌러앉아 다시 보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셋째 남규 형은 군대에 가기 전까지 우리 집에서 작은 머슴으로 온갖 궂은일을 맡아 했으며 군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도 들렸으며 우리가 서울로 이사한 74년에도 어머니를 보러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남규 형 아래로는 “쪽간이”로 불리는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은 큰 쪽간이 작은 딸은 작은 쪽간이로 불렀는데 큰 쪽간이는 나와 나이가 같았으며 작은 쪽간이는 세 살이 적었는데 경규 형이 결혼한 후 경규 형 부인이 쪽간이라는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해서 큰 쪽간이는 “여순” 작은 쪽간이는 “영순”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그 후로는 “여순”과 영순“으로 불리었다.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쪽간이들과 새금파리를 모아 흙에 물을 섞어 밥을 만들고 풀을 뜯어 반찬을 만들어 상을 차리고 아버지 어머니 하며 까끔살이를 하며 놀고는 했는데 언젠가 깐난이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결혼한 경구 형이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순창으로 이사를 하면서 깐난이네와 인연이 끝났다.
경규 형네가 이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깐난이네가 살던 집은 뜯어내고 밭을 만들었다.
동네에서는 우리 집이 가장 아래쪽에 있었으며 우리 집 위에는 큰할아버지 내외분이 큰아들 내외를 비롯한 그 자녀들과 손주들과 함께 사셨다.
큰 집도 우리 집과 더불어 동네에서 세 채의 집이 있었으며 사랑채를 빼고는 “ㄴ”자 형으로 지어진 우리 집과는 달리 세 채 모두 “1”자 형이었다.
먼저 마당을 높게 돋아 남향으로 큰 채를 앉히고 마당 서쪽으로 마당보다 조금 높게 새방 채를 앉혔으며 마당으로 새방 채 끝머리에 돼지를 키우는 돼지우리가 있었으며 돼지우리를 앞으로 사랑채가 남향으로 앉아 있었다.
큰집은 동네에서 우리 집 다음 부자로 우리 집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가세를 이룬 가문으로 28대에 걸쳐 우리 문중의 대를 이어온 종가다.
큰할아버지께서는 12살의 나이에 호남지방 소년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실 만큼 뛰어난 문재셨으나 우리나라가 일본에 망하자 웅지를 접으시고 평생을 조용히 살다 가셨다.
일찍 돌아가셔 아무 기억이 없는 우리 할아버지와 달리 큰할아버지께서는 건강하게 장수하셔서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생전 처음으로 삼일장으로 치러진 상가(喪家)의 모습과 정경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다.
출상 일이 되어 상두꾼의 구슬픈 만가(輓歌)의 인도를 받으며 상여꾼들에게 매여 장지로 향하는 상여 행렬을 쫒아가며 무엇이 그리도 슬펐는지 학교도 가지 않은 채 태어나 처음으로 서럽게 울었는데 다음 날 학교에 가서 큰할아버지의 증손녀 난이는 학교에 왔는데 남인 네가 왜 학교에 오지 않았느냐며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큰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생애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으며 죽음이란 문제는 그 후 오랫동안 내게서 떠나지 않은 커다란 화두로서 아직도 죽음이란 화두에 대해 실체를 접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언급하고자 했던 것은 큰할아버지의 죽음보다 우리 마당 남동쪽으로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는 작은 언덕을 접해 있는 큰집 새방 채에서 생후 처음 노랫소리가 들려 노랫소리에 끌려 열린 문 앞에 가보니 새카맣고 둥그런 판이 돌아가면서 노랫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그 노래를 들으며 전기가 온몸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짜릿함에 넋을 잃었으며 그것이 “유성기”라는 사실은 그 후로도 몇 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때 유성기를 통해 들었던 노래가 얼마나 황홀했던지 몇 번 반복해서 듣는 동안에 가사를 외워 부르게 됐으며 이때는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로 그때 들었던 노래가 당시 가장 유명했던 대중가수인 “남인수” 씨가 불러 휴전 후 전쟁으로 황폐한 민족의 심금을 울렸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란 노래란 것을 안 것은 국민학교 졸업 후 유행가에 흠뻑 취해 대중가요란 책들 가운데 “흘러간 옛 노래”라는 책을 사서 본 후의 일이다.
유성기는 손으로 태엽을 감아서 레코드판을 돌려 노래를 들었는데 감은 태엽이 거의 풀려 가면 노랫소리가 차츰 늘어지다가 태엽이 완전히 풀리면 레코드판이 멈추면서 노래도 끝났다.
내가 큰집 새방 채에서 유성기를 통해 처음 들었던 ˝이별의 부산 정거장”보다 더 아름답고 환상적인 노래를 아직 들은 적이 없으며 유성기가 있던 방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나는 사람은 큰할아버지의 큰아들의 막내이자 넷째 아들인 저마 형과 작은아버지의 큰아들인 지나 형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때의 영향이었는지 아니면 노래에 소질이 있었는지 몰라도 한 번 들은 노래는 가사는 몰라도 멜로디는 거의 틀리지 않을 정도로 흥얼거리게 되었으며 머슴이나 동네 청년들이 부르는 유행가를 듣고는 따라 배워 곧잘 노래를 불렀으며 “이별의 부산정거장”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고향초” “황성옛터” “청춘고백”등이 내가 유년기에 즐겨 부르던 노래들이었다.
그 외에도 즐겨 부르던 노래로는 “일천칠백도 남쪽 바다 갈매기 울어 울어 대한 남아 뱃사공 어디로 갔느냐...”는 노래와 “양양한 앞길을 바라 볼 때에 혈관에 파도치는 애국의 깃발.”이라는 독립군가로 생각되는 노래들도 있었다.
유년 시절의 내게 노래보다 좋은 것은 없었으며 그 때문이었는지 내 사춘기 시절은 온통 노래에 미쳐 살았다.
악기에는 소질이 없어 잘 치지도 못한 기타를 몇 개씩 사는가 하면 사들인 노래책이 수십 권이 넘었다.
/ 길손 -실패한 인생의 자서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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