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배기 동진이, 여덟 칸짜리 국어 공책에는 줄줄이 빨간 볼펜으로 임 동진을 적어두고 따라 적기를 시도해 보지만 커다란 우주선 하나 달랑거려놓고 그 아래 연을 날리는 자신의 모습과 평소 키우고 싶다던 강아지 한 마리와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형이 그려져 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 다음엔 열. 하나, 열둘. 그 사람 다음엔. 다음엔. 와. 많다. 이런 식이다. 동진 이가 제일로 좋아하는 건 그림 그리기와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인기인 디지몬 스티커 모으기이다.
아기 때부터 등진 이의 스케치북이 되어버린 벽지는 아랫부분에서 시작으로 이제는 훌쩍 커버린 키만큼이나 그림의 키가 커져 있어 엄마 허리 아래의 세상에는 외계인도 살고 있고 수많은 모양의 우주선이 불을 뿜고 별똥별을 헤치고 우주여행에 신이 났다.
작년에 잃어버린 장난감 트럭이 아직도 마법의 성을 만드느라 분주한데, 초록색 색연필로 병정들이 성을 지키게 해야 한다며 동진이의 고사리손이 바빠진다. 이제는 제법 그림의 굴곡과 형태를 잡아가면서 꽃들에도 사람에게도 표정을 넣어주며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데, 엄마는 그만 크레파스로 빗금 쳐진 무지개처럼 환하게 웃고 만다.
˝어머니 동진이가 또래보다 많이 떨어져요.˝ 선생님은 동진이 엄마보다 더 크게 걱정하신다. 엄마는 선생님의 말씀이 고맙기는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말수가 적고 표현력이 엉뚱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상대를 웃기게도 하지만 한 번도 어른들에게 반말하지 않는 아이, 친구들에게 항상 웃음을 주는 아이, 다소 호의적이라서 가지고 있는 장난감과 과자를 몽땅 줘버려 엄마에게 다시 사달라고 떼를 쓰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리석음이라 탓하고 싶진 않다.
별 아픈 곳 없이 건강한 다리로 뒷산에 올라 한참을 놀다가는 처음 보는 죽어있는 쥐가 신기하다며 집에 들고 와 엄마를 기겁하게 하고 영리한 형에게 바보 같은 놈이라고 꿀밤 세례로 혼이나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지만 형이 올 시각이면 어김없이 아파트 계단 장미 넝쿨 아래 벤치에 앉아 큰 눈을 깜박이며 기다린다.
동진이와 함께 대형상점에 들렀다. 형은 장마철에 쓰고 다녀야 할 자동우산을 고른다. 붉은 악마 티셔츠에 맞춰서 입을 붉은 색 바지를 사달라고 조른다. 동진이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디지몬 스티커를 고른다.
형은 붉은 바지를 입고 한 참을 거울 앞에서 서성대다가 축구공을 들고 친구들과 운동장으로 달려가고 동진이는 동화책을 펴놓고 그림을 그리다 싱크대 서랍으로 가서 나무젓가락을 들고 오더네 스케치북을 돌돌 말아 부채를 만들어 장마철에 더운 엄마의 부엌 쪽으로 자꾸만 바람을 보낸다.
해님이 없어질 때쯤이야 귀가하는 형은 흙이 묻은 축구공을 욕실로 들고 가 샤워기를 틀어서 씻는다. 축구공 한 번 마음대로 만져보지 못하는 동진이는 힐끗거리며 형의 주위를 머뭇거리다가 ˝엄마, 배고파요. 된장 구워서 밥 주세요.˝ 한다. 형은 ˝바보, 된장을 끓이지. 굽냐? 초등학교 삼 학년의 형은 재밌다며 웃는다. 지지 않는 동진이 ˝엄마…. 밥 구워서 된장 볶아서…. 밥 주세요.˝ 한다. 가족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동진이 때문에 웃음바다가 된다.
엄마는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결에 얼굴로 새의 깃털이 지나가는 부드러움 같기도 한, 바람에 살랑대는 초록 이파리의 간지럼 태우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을 받으며 달콤한 잠 속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득히 들려오는 웃음소리, 두 아이의 미소가 눈에 들어와 한참을 보고 있다. 왜 그럴까? 거울로 달려가서 보니 이게 웬일이야? 얼굴엔 별처럼 반짝반짝 디지몬 판박이가 양 볼에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어젯밤 잠결의 느낌이 생각이 났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간 후 엄마는 판박이를 욕실에 앉아 지울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월드컵 동안 판박이가 유행이다. 물론 멋진 축구공 모양이나 ˝ 대한민국˝ ˝코리아 패기˝ 같은 문구는 아니지만 뭐, 어떠냐? 귀여운 디지몬이 특이하다고 엄마는 생각했다.
정말 동진이의 그림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이젠 집의 벽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엄마 얼굴까지 스케치북으로 착각을 하니 이대로 가다간 온 집안이 동진이의 그림과 스티커로 도배가 되겠다.
동진이의 배, 팔, 허벅지, 손등, 평평한 살집 부분에는 디지몽의 여러 모습을 담은 판박이가 수도 없이 붙어있다. 혹여라도 목욕하다가 그것이 지워지면 한 시간을 운다. 결국엔 스티커를 사서 다시 붙여줘야 하므로 엄마는 매우 조심스럽게 비누질을 해줘야 한다.
동진이와 엄마 사이에 놓인 숫자와 글자의 벽돌은 언제 허물고 정복이 될까? 지금은 수많은 꿈을 꾸고 있는 아이의 머릿속은 상상력으로 가득한데 눈에 보이는 학습이 뭐 그리 대단하여 애태우겠느냐는 심정으로 엄마는 많은 매스컴의 유혹에 고개를 돌리고 비뚤어진 글자에 답답해하지 않기로 했다.
유명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어릴 때 학교 다니며 공부하기를 너무 싫어했다고 한다. 글자도 제대로 모르고 학습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는 시간만 나면 산으로 들로 바다로 뛰어다니며 세상을 눈 안에 넣곤 했다.
어느 날, 그는 부모님에게 사진기 하나만 사 달라고 한다. 그는 세상의 모습을 일일이 찍기 시작했다. 하늘로 걸어가는 구름의 모습, 꽃들의 함성, 새의 움직임, 별들의 이동, 달빛의 고고함 등등, 그렇게 모인 사진으로 열세 살의 나이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시사회를 열었다. 그는 관람료를 받았고 그 만의 독창성과 열정으로 이루어진 작품에 신기해하며 친구들은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지금은 세계적인 할리우드의 대 스타로서 인정받게 된 이면<裏面>에는 분명 그의 부모님이 계셨다. 세상의 불협화음 속에서도 그의 시야를 가리지 않고 끝까지 꿈을 믿어줌 때문이었으리라.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소중한 것이 많다고 가르쳐 온 엄마는 동진 이의 재능과 꿈을 믿는다. 하얀 스케치북 위에 언제든 그리고 싶은 꿈과 자유를 펼치길 간절히 바라본다. 아프지만 않다면 말이지. 엄마는 동진이가 뭘 해도 좋아. 누구나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의 빛이 되는 거라고 말해 주면서
월드컵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엄마의 사랑을 보글보글 된장찌개로 올리고 크레파스로 얼룩진 팔과 얼굴을 씻어주었다. 물론 디지몬 스티커를 주의하면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동진이 ˝엄마, 밥 한 마리 더 주세요˝ 한다.
/ 김영애 -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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