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는 언제나 ´무´에서 시작되는 법. 비어 있는 곳에서야 비로소 창조가 시작될 수 있는 법. 모든 공간이 꽉 채워져 있는 곳에서는 어떤 새로운 창조도 생겨날 수 없는 법. 상상력이 피어날 수 있으려면 삶에 여유, 곧 ´공간´이 있어야 하는 법. 빈자리가 없는 사회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만들어낼 수 없는 법.
마포에서 충정로를 거쳐 광화문에서 종로로 이어지는 도심 재개발 사업을 지켜보며, 쭉쭉 솟아올라 한 치의 틈 없이 서울의 하늘을 메꿔 버리는 그 흉악스러운 빌딩들을 올려다보며, 나는 정말로, 정말로 숨이 막혀. 그 빌딩 하나하나엔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상주하게 될까? 그 사람들이 정오만 되면 모조리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상상해봐. 줄을 서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어깨를 다닥다닥 붙이고 커피? 마실 것이 뻔하지. 과연 그들을 인간(人間)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부를 수 있을까? 무서워.
인간에도, 공간에도 ´사이 間´ 자가 들어간다고 알고 있어. 사람이 되려면 그사이에 빈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어.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선 모든 방향으로 빈자리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어. 마포에서 종로까지 빈자리는 어디에 있지?
경희궁이 있지 않냐고?
아니. 경희궁조차 시립미술관으로 채워져 있잖아. 나무가 심어진 몇 뼘 땅을 빼면 못자리 시멘트로 ˝채워져˝ 있잖아.
/조병준 - ´길에서 만나다´ -시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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