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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이 보이는 창

외통 2023. 4. 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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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이 보이는 창

피로한 눈을 쉬려면, 나는 사무실 작은 창문을 통하여 밖을 내다본다. 다행히 내 사무실은 자동차 소리가 시끄러운 큰길 쪽으로 면해 있지 않고 주택가 쪽으로 향해 있어서 조용한 편이다. 따라서 밖의 풍경은 마치 어느 소읍(小邑)의 모습과도 같이 평화스럽기조차 하다.

창문을 통하여 보이는 것이라고는 크기와 모양새가 고른 살림집들과 작은 교회당 하나, 그리고 드나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미용실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다 내가 누구를 붙들고 자랑하는 것은 창문에서 마주 보이는 작은 산이다. 그 산에는 제법 넓은 산길이 휘돌아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산에 길이 그렇게 반듯하게 나 있다는 것은 옛날에는 사람들이 그 고개를 자주 넘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 고개를 넘어가면 어디에 이르는 것일까. 사람들은 무슨 볼일로 그 고개를 넘었을까. 잡목밖에 없어 보이는 볼품없는 산이지만, 그래도 잎이 무성한 여름이면 옛날 사람들은 행여 호랑이라도 나올까 봐 가슴을 조이지 않았을까. 창문을 통하여 바라다보이는 그 산은 내게 동화 같은 궁금증을 안겨주곤 한다.

옛날의 추억 속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전래 동화를 연상케 하는 풍경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기쁨이다.

겨울에 사무실을 얻어 정초부터 일을 시작한 내 작업실의 또 하나 자랑거리는 따뜻한 햇볕이 종일 머물다가 가는 남향 방이라는 것이다. 겨울의 햇빛은 은혜로움이다. 햇빛은 추위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조차 너그럽게 해주는 따스함이다. 이 겨울에 햇빛이 들어오는 사무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행운이다.

내게 이런 행운이 다 마련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미치면, 그것은 누구에게로 향하는지 모를 감사로 이어진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몇 가지 소리가 올라온다. 첫째는 주택가 입구에서 윷판을 벌인 노인들이 희미하게 다투는 소리요. 둘째는 징 소리이다. 이 징 소리가 처음 들렸을 때 나는 그것이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하고 얼른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긴 철사를 둘둘 말아 어깨에 둘러멘 굴뚝 청소부가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골목길을 누비며˝ 두부 사려! 늘 외치던 두부 장수가 사라진 것 같이 이제는 굴뚝 청소부들이 자취를 감춘 줄 알았는데, 그 모습은 잊혀 가는 풍물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그림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어디에선가 닭 우는소리가 작게 들려온다는 것이다.

서울의 가정집에서는 이제 닭을 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소리는 어디서 나는 것일까. 생텍쥐페리가 불시착한 리비아 사막에서 생사를 헤매고 있을 때 구원처럼 들려온 것은 수탉의 울음소리였다. 그것이 결코 환청이 아님을 확인하자, 그는 이제 자신이 구제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하게 된다.

닭의 울음소리는 여명( 黎明 )을 예고하는 시작의 소리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인간이 있고 생활이 있음을 알리는 또 하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새해의 첫머리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사무실을 얻었다는 것은 나로서 어떤 희망의 조짐인 양 생각하고 싶어짐을 어찌하랴.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줄곧 직장 생활을 했었다. 그러다가 어떨 때는 내 참을성 부족으로, 또 어떨 때는 내 의사와 상관없는 이유로 직장을 떠나게 되어 오랫동안 집에서 ´ 재가근무(在家勤務)를 해 왔다. 그러자니 생활 자세는 자연 무질서해지고 점점 나태해져서 점점 헤어나기 어려운 무력감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자꾸 안으로 오그라드는 사고에다 배타까지 곁들여지게 되니, 이젠 정말 어떤 변화를 꾀해보지 않으면 안 될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집의 작업실을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남들처럼 아침이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저녁이면 어둠을 등지고 퇴근을 하는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열 평도 못 되는 나의 사무실에 나는 내 꿈과 희망을 조심스럽게 옮겨놓았다. 그리고 안으로 닫아걸고 있던 나 자신을 어느 정도 개방시키는 일에 스스로 타협을 보았다. 그리하여 요즘 나는 여느 직장인들처럼 이른 아침부터 사무실에 나와 앉아 신문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일도 한다. 그리고 가끔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찾아주는 반가운 분들에게는 서투른 솜씨로나마 차를 끓여 대접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또 먼 곳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이게 되면 창문을 통하여 앞산을 바라본다. 지금은 기척도 없이 잠들어 있는 산이지만 봄이 되면 분명 산은 기지개를 켜며 깨어날 것이다. 그때 산은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다가올까. 또 나는 그때쯤이면 얼마큼 자신 있는 모습으로 남 앞에 서게 될까. 희망과 기대 속에서 산과 나는 닮은 하나의 모습이다. 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변모될지 모르는 하얀 캔버스와도 같다. 그 산길로 해서 봄 아가씨가 넘어올 것만 같은 부푼 기대를 안고, 지금도 창문을 통하여 먼 산을 바라본다. 어디에선가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 이정림 -시 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