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여, 오늘은 사과나무 한 그루의 사연으로부터 이 편지를 시작하려 합니다. 며칠 전 새벽 산책길에 우연히 올려다본 허공에는 강하게 쏘는 붉은 빛 하나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폭죽처럼 붉은빛들이 터지고 있었습니다. 이 회색 도시 한가운데 내가 사는 아파트 뒷마당에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는 저 홀로 자라 그토록 청정한 빛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웬 사내가 나무 한 그루에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요새 나는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그 사과나무로 인해 행복합니다. 창조주가 은실을 짜듯 열어 놓은 하루의 첫 새벽에 그 빛나는 열매들과 만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춘천으로 가면서 나는 마임배우 유진규가 우리 예술계에 숨겨진 사과나무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하고도 도심인 방배동의 탁한 대기 속에서 한 그루 사과나무가 저 홀로 기쁨의 열매들을 맺고 있듯이 유진규라는 사과나무도 이 시대의 탁한 대기 속에서 예의 빛을 영롱하게 내뿜고 있는 신비한 존재입니다. 그 나무는 수향 춘천의 물가에 심어져 아침저녁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새벽이슬과 저녁노을을 먹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그 유진규를 다시 만난 것은 실로 십여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황혼이 내리는 의암호 저편에서 그는 내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와 나 사이로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 같은 모습과 상큼한 미소는 여전하였습니다. 예나 이제나 그가 하는 일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가 『무얼 먹고 사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맑게 웃으며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원래 나는 소식가”라고.
예전에 서울의 신촌 시장 들어가는 골목 한쪽에는 이제는 전설처럼 되어버린 ‘76 소극장’이 있었습니다. 연출가이자 배우인 기국서, 기주봉 형제가 주머닛돈을 털어 이끌었던 이 집에는 장안의 기질 많은 사내들이 모여들었고 마임이스트 김성구와 유진규도 나와 함께 그 안에 있었습니다. 서양식의 호사한 살롱 드라마 같은 것과는 달리 공연 때면 시장 안의 그 가난한 공간에서는 효과음처럼 신촌역 기차 소리가 들리곤 하던 곳이었습니다. 온갖 차량의 소음과 시장 바닥의 소리가 먼지처럼 부유하는 그 공간에서 그러나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소원이라면 오직 하나, 그곳이 세를 못 내어 문을 닫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소원은 무너져 골목 안 극장은 문을 닫게 됐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소극장을 떠나던 날은 하늘을 메우며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빽빽이 내리는 눈 속에서 그와 나는 악수하였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서울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돌아서면서 이런 말을 보태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은… 사람의 자존심을 형편없이 구겨버리는 도시이기 때문이오.” 낡은 코트 차림으로 휘적휘적 그 골목을 걸어 나가던 유진규의 허해 보이는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바로 그날의 풍경이야말로 스산한 우리네 예 동네의 풍경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듬해 춘천 어딘가에서 그로부터 엽서가 날라왔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서울은 나를 쫓았지만, 춘천에서 나는 일어설 것입니다.”라고. 그 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가 어느 핸가 다시 나의 전시회에 나타났습니다. 춘천 교외의 신남역 부근에서 소를 좀 키우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마임을 그만두고 축산으로 돌아섰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새 소의 눈과 말을 맞추는 연습을 좀 한다고 했습니다. 소가 그의 동료 배우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쩐지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습니다.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임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숫제 불덩이가 되어 있었던 것 입니다.
우리는 멀리 삼악산, 국사봉, 우두산 자락을 적시며 흐르는 의암호를 바라보고 섰습니다. 가을산이 고요한 물위에 흔들거리는 모습이 수채화와 같았습니다. 나는 비로소 그가 소음의 도시 서울을 떠나 물과 안개의 도시 춘천으로 온 것이 잘한 일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호반의 도시는 그에게 침묵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무설전’ 같은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일찍이 그의 동료 배우가 되었던 것은 말없는 소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저 호반과 그 호반에 떠오르는 달과 그 위를 스치는 바람과도 그는 말 없는 말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과연 그는 춘천에서 우뚝 일어섰습니다. 자신이 일어섰을 뿐 아니라 마임 페스티발을 이끌며 춘천을 국제적 마임의 도시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실로 괴력이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비와 바람을 부르는 도인처럼 그는 세계 일급의 마임이스트들을 안개와 물의 도시 춘천으로 불러 들였던 것입니다. 고수 유진규의 기에 빨려들 듯 세계의 내로라 하는 이 분야 사람들이 해마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춘천으로 몰려들고 있으니 참 신기한 노릇입니다. 우리는 물길을 끼고 돌아 김유정 문학비가 서있는 오르막길로 들어섰습니다. 하얀 가을꽃 몇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빛과 고요를 사랑합니다. 그것들을 공손하게 받아 내 몸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는 시인처럼 말했습니다.
이 말로 넘쳐 나는 세상에 유진규는 오히려 말없음의 세계 속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그 하얀 침묵 공간에서 그는 혀의 말 대신 몸짓의 말을 토해냅니다. 그가 토해내는 몸짓의 말들은 그러나 어떤 혀의 말보다도 더 격렬하고 더 고통스러우며 더 부드럽고 더 준엄합니다. 그 점에서 유진규는 배우이기 이전에 예의 선사입니다. 이 말 많은 세상을 향해 지팡이 하나 없이 침묵으로 할! 하는 선사인 것입니다.
/김병종의 신 화첩 기행 <4>- 한국화가·서울대 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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